2 나의 글

서로박: 이성 국가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필자 (匹子) 2023. 9. 19. 09:46

 

“타자를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취해야 한다.” (장 작 루소)

 

친애하는 J, 타자를 이해하려면, 타자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타자와 무조건 동일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판적 거리감이지요.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일이야 말로 학문 행위에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지 말고, 이를 견지하되 타자에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깨닫고 자신의 태도를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송두율: 불타는 얼음, 후마니타스 2017, 116쪽 이하.)

 

윤평중 교수의 책 『극단의 시대에 중심 잡기』 (생각의 나무 2008), 그리고 『국가의 철학. 한반도 현대사의 철학적 성찰』 (세창 2018)을 읽어보았습니다. 그의 글은 논의에 있어서 명징하고 질서정연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미리 설정한 논리적 범주가 너무나 완강하여, 때로는 사실적으로 적확한 내용 파악을 힘들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송두율 교수의 사회학 내지는 정치관을 비판합니다. 송 교수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소련 그리고 북한 등에 대한 부정적 시각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후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반공주의의 성향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는 동아일보의 언론인, 신상초 (申相楚, 1922 – 1989)의 공산주의 비판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에 적용되는 실제의 사회주의 정책에는 많은 결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제삼세계 등에서 채택되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논거마저 통째로 배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옳든 그르든 간에 더 나은 삶에 관한 갈망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세우는 이성 국가에 관한 엄정 중립주의가 실제 현실 차원이 아니라, 변증법적 현실 차원이라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변증법적 현실”이란 주어진 현실에 대한 헤겔의 의식에 개념화된 현실입니다. “뷔리당의 당나귀”를 예로 들어 봅시다. 프로이트는 정서적 애증이라는 기이한 모순을 설명하려고 그것을 상정하였습니다. 굶주린 당나귀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두 개의 먹이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다가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변증법적 현실에서만 가능합니다. 실제 현실에서 굶주린 당나귀는 아무거나 닥치지 않고 먹이를 먹어 치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엄정 중립적인 이성 국가는 하나의 변증법적 현실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 현실에서는 좌 아니면 우로 치우쳐서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지식인이라면 누구든 이성 국가를 정립시키고, 이러한 토대에서 혼란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적인 범례를 요청하려는 욕구를 지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추상적 변증법의 현실이라는 토대에서 도출되는 것인데, 과연 아무런 여과 없이 실제 현실의 토대 내지는 현장 정치 전선에 직접적으로 대입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 철학의 특정 이론적 논거는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현장 정치에 대입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요? 아니, 이론은 원래 과거의 현실적 토대에서 구성된 것이며, 지나간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특정한 현실을 전제로 제기된 이론적 결론이 미래에 도래할 현실의 정치적 난제에 있는 그대로 대입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요? 윤평중은 헤겔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헤겔은 변증법적 현실의 토대를 전제로 하여, 세밀하게 자신의 국가 이론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실제 프로이센 현실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처음부터 시대정신은 우측으로 기울어진 것이었습니다. 헤겔의 엄정 중립주의의 사고는 성장하는 수구주의 국가, 프로이센의 국가 중심주의에 교묘하게 이용당했습니다. 이는 변증법적 모순 관계의 토대가 현실적 모순 관계의 토대가 서로 어긋났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헤겔이 살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19세기 프로이센을 토대로 형성된 헤겔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이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21세기 한반도의 정치 영역에 무지막지하게 적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윤 교수는 엄정 중립주의의 이성 국가의 상을 일차적으로 설정한 다음에, 이를 여러 다른 문헌 그리고 여러 다른 현실에 적용하려 합니다. 이는 자신의 추상적인 원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른 문헌 속에 언급되는 견해의 역사적 현실적 맥락은 그에게는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좌(左)도 아니고 우(右)도 아닌 엄정 중립주의라는 논리성입니다. 모든 객관적 자료는 자신의 논리적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용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범례는 일차적으로 예외 사항, 다시 말해서 논외로 처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윤노빈과 리영희에 대한 비판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윤평중은 이들의 저서를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다만 엄정 중립주의에 근거한 이성 국가의 논리에 침잠하여, 외부인의 자세를 취하면서 논의의 바깥에서 이들의 정치적 입장을 통째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하나의 이론은 어떤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장소에도 똑같은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문제는 윤평중 교수가 추구하는 엄정 중립적인 합리성이 주어진 현실에서 공명정대한 수직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윤평중이 천편일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극단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그는 좌우의 독단적 입장과 무관하게 자유의 합리성에 입각한 엄정 중립주의의 사고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엄정 중립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90도 수직으로 바로 세워진 공평무사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변증법적 모순 관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주어진 현실적 모순 관계 속에서는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실제 현실은 안타깝게도 변증법적 현실과는 달리 철저한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시대 정신은 다수의 견해에 의존하는데, 좌우 대칭의 견고한 구성체로 확정된 게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 인간의 견해들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움직이는 시계추를 방불케 합니다. 바꾸어 말해 시대정신은 마치 물질처럼 끊임없이 유동하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스스로 변모하는 무엇입니다. 왜냐면 국가와 사회 구성원의 사고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유동하여 탄생과 사멸을 반복하는데, 시대정신 역시 이와 함께 정지 그리고 변모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남한 사람들의 정치관은 딱딱한 고체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물비늘 위의 90도라는 엄정 중립적인 잣대를 드리울 만큼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1953년 이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적 정황 때문입니다.

 

남한의 정치적 지형도는 어떠한가요? 한반도는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강하나, 반미 감정은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21세기 남한의 국회에는 중도 우파 그리고 극우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습니다. 조중동과 같은 신문사 그리고 우 편향적인 종편 TV이라든가 국회의원의 정당 등을 비교해보면, 남한 사회가 얼마나 우 편향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남한의 정치 풍토는 우측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분단의 현실은 싫든 좋든 간에 남한 사람들에게 반공주의의 경향을 공고히 하게 했습니다. 625사변이라는 비극에 대한 끔찍한 체험은 반공주의라는 방어막을 더욱더 단단히 다지게 했는지 모릅니다. 전쟁 비극의 상처는 차제에는 반드시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마땅합니다. 자고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그런데 남한의 정치적 판도는 실제 현실에서 마치 어설프게 비행하는 날짐승을 방불케 합니다. 날짐승은 좌측의 날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비탈길 위에서 우측으로 원을 그리면서, 하늘 위로 비상하려고 하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진 채 자전합니다. 그렇기에 여름과 겨울의 밤낮의 길이가 다르지요. 만약 누군가 지구가 기울어진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게도 낮과 밤의 길이를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 작위적이고 무리한 시도라고 판명될 것입니다. 극단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우리는 지상에서 무조건 90도 수직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어느 정도 기울어진 잣대를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정신이 우측으로 향하고 있는 현재 세상에서 올바르게 중심을 잡으려면, 좌측으로 기울어진 기준이 의외로 올바른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우-편향적인 시대정신을 용인하지 않은 엄정 중립주의는 자신의 시각이 기울어졌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반동주의로 매도될 소지를 처음부터 안고 있습니다. 윤평중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성 국가는 실제 현실의 모순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 모순 관계, 다시 말해서 헤겔이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낸 엄정중립의 수직 구도로 정착된 상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엄정중립을 지향하는 변증법적 모순을 실제 현실의 모순에 무리하게 대입하게 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도출될지는 뻔한 노릇입니다.

 

오래전부터 진보를 표방하는 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조선일보에 칼럼을 발표함으로써, 연속적으로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판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엄정 중립적 이성 국가는 실제 현실에서 출현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현실의 차원에 떠오르는 하나의 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사상뿐 아니라, 합리적 보수의 사고 역시 정치권력에 이용당해온 경우를 역사에서 수없이 접해 왔습니다. 왜냐면 현실은 다양한 관점의 프리즘에 의해서 서로 다른 각도 그리고 색채로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피하려면, 양비론적 사고 내지는 헤겔의 국가 이론에 나타난 엄정 중립주의라는 논리성을 떨치고, 선이해(先理解, Vor-Urteil)를 배격하면서 자연과학자의 귀납적인 방식으로 연구 대상에 미시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회주의의 이상 그리고 기존 사회주의의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간격이라든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등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리영희와 윤노빈의 사상을 하나의 단단한 고체로 못 박으면서, 여기에 변증법적인 국가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는 것은 반공주의에 근거한 천박한 프로크루스테스의 폭력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타자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면, 특정 사상의 바깥에 머물면서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이라는 선입견을 일차적으로 접고, 객관적으로 상대방이 처해 있는 현실적 맥락 속으로 파고들어서,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추적해야 할 것입니다. 내부로 잠입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바깥에서 바라보면서 그것을 하나의 엄정 중립주의의 고체적인 상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추상적 논리성이라는 아포리아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