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III) 서문

필자 (匹子) 2023. 4. 22. 11:15

(앞에서 계속됩니다.)

 

제 3부에 실린 글은 얼핏 보기에는 블로흐 연구와 무관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연구 대상은 다를지 몰라도, 독자들은 논의의 전개 및 방법론에 있어서 에른스트 블로흐를 유추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첫 번째 글 「이반 일리히의 젠더 이론 비판」은 미발표의 논문으로서 일리히의 저작물 『젠더』를 비판적으로 구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려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일리히의 과거 지향적 관점이 퇴행의 반동적 세계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젠더에 대한 일리치의 시각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추상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점입니다.

 

「원시 사회는 암반위에 있고, 문명사회는 절벽을 기어오르는가?」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에 관한 서평으로서 『황해문화』2012년 봄 호에 실린 바 있습니다. 「푸리에의 유토피아 팔랑스테르, 크 특성과 한계」는 『오늘의 문예비평』2013년 여름 호에 발표된 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공동체가 어떻게 인간의 향유와 노동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어지는 글 「생존은 막힘없이 피어나는 우주의 꽃이다. 윤노빈의 한울 사상」은 처음에는 연세대 대학원 신문에 발표된 작은 글이었는데, 이번에 대폭 수정된 것입니다. 필자는 『신생철학』의 주제가 1970년대의 한반도라는 시대정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그 이후의 생명사상과는 거리감을 드러낸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다음은 벤야민에 관한 두 편의 논문입니다. 「유물론적 모더니스트, 발터 벤야민」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 관하여」는 필자의 번역서,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 1992)에, 『브레히트와 현대 연극』2001년 가을 호에 각각 실린 바 있습니다. 두 편의 글을 통하여 필자는 블로흐와 벤야민 사이의 사상적 차이 그리고 그들이 표방하는 철학적 미학적 사상의 특성들을 구명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전합니다. 원래 필자는 『블로흐 읽기』시리즈를 통하여 아비센나, 아베로에스 아비케브론으로 이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사상 및 이에 관한 블로흐의 연구를 게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관한 철학적 구명 작업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 그리고 능력을 고려할 때 단기간에 완결될 사항이 아니며, 더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시간을 두고 깊이 천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블로흐는 “인간은 항상 초보자이다. Homo semper tiro.”라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그러합니다. 계속 배우면서 모자라는 점을 보충해나간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그리고 이에 관한 블로흐의 입장 등을 추후에 한 권의 책으로 간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친애하는 J, 처음부터 출산을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니, 어느새 한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약간의 체력 저하를 느끼지만, 당신을 위해서 계속 다른 아기를 세상에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로흐는 “사랑이란 어떤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Love is a journey into a totally new life.”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무엇을 하나하나씩 배워나가게 되면, -마치 사랑하는 자의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듯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놀라운 신천지일 테니까요.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여행을 마다할 자가 어디 있으랴마는, 어디엔가 안주하고 싶은 게으름 내지 나약함이 마음속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삶 자체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사랑하는 과정이라면, 또 다른 출산을 꿈꾸어야 한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곤 합니다. 비록 부족한 책이지만, 그래도 당신과 같은 몇몇 젊은 노동자에게 애호의 대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안산의 우거에서

필자 올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