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부마항쟁과 라보에시 (2)

필자 (匹子) 2021. 6. 16. 19:26

그래, 독재자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사랑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70년대 말경에 라보에시의 책을 간행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는 그 자체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닌가? 라보에시는 유신 말기와 광주 사태의 숨 막히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야말로 예언적으로 시사해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친구는 서울에 거주하는 묘령의 여대생으로부터 면도날 들어 있는 백지 편지 한통을 받았다고 했다. 추후 알게 된 소문이지만 부산의 많은 학생들이 면도날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수염 깎지 않는 남쪽 대학생의 외모를 질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면도날은 “데모하지 않는 부산의 대학생들이여, 차라리 남근이나 잘라버려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북녀 (北女)들의 잔인한 독려 때문이었을까, 얼마 후 남남 (南男)들은 부마항쟁을 거세게 일으킨다. 그리하여 18년 동안 장기 집권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 말에 암살당한다. 80년대 초에 광주에서는 전두환 군사 정권에 의해서 끔찍한 학살극이 발생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피 흘리지 않고 이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유에는 항상 피의 냄새가 수반된다. 그 까닭은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의 곁에 항상 이를 방해하는 자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90년대에 나는 다시 라보에시의 문헌을 다시 잊었다. 직업 정신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불안이 가라앉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소책자에 관해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6년에 안식년을 맞아 잠깐 유럽으로 향했다. 이때 나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어느 고서점에서 라 보에시의 프랑스 원본 한 권을 발견했다. 아니, 내가 원본을 발견한 게 아니라, 원본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표현해야 타당할 것이다.

 

원본은 멀리 동양에서 온 이방인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래, 언젠가는 기필코 라 보에시 문헌을 다시 간행하리라.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 작업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 2003년 가을 어느 날 전남대학교의 윤수종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라보에시의 문헌과 번역본에 관해 문의하였다. 부끄러운 번역서가 다시 거론되는 데에 쑥스러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하여 번역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은 21세기 초의 시점에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리라. 그럼에도 한 가지 사항을 첨가해보기로 하자. 오늘날 독재를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억압과 폭정에 관한 역사를 케케묵은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무릇 민주주의는 마치 어떤 선한 싹과 마찬가지로 매우 유약한 무엇이다. 그것은 라 보에시의 비유를 도입하자면 세밀하게 보살피지 않을 경우, 금방 시들어버린다.

 

가령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 테러리즘에 의해 오랫동안 위협 당한 것을 성찰해 보라. 나아가 전쟁과 권력 사이의 상관관계는 끊임없이 신문 기사로 실리고 있지 않는가? 한마디로 인간은 얼마든지 어느 단체 혹은 어느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권력이나 단체에 예속되려는 성향에 대해 항상 경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라 보에시의 문헌은 정치학도 뿐 아니라, 건전한 현대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번 기회를 빌어 전남대 윤수종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출판을 선뜻 결정해주신 울력 출판사 강동호 사장님에게도 감사드린다. 누가 말했던가, 바람직한 삶이란 어차피 다른 사람들을 돕는 과정이며, 티 없는 삶이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역자는 가깝지만, 멀리 살고계시는 윤 선생님과 김준홍 형에게 새로운 번역서를 바치면서, 한마디 묻고 싶다. “이래도 엉터리인가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