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29

크리스타 볼프: 미래의 기억 (2)

바꾸어 말해 산문 작품은 개별적 인간에게 향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학문과 과학 기술의 영역에서 새롭게 발명된 것들이 사회적 질서에 무조건 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모든 것은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발명품에 좌지우지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항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모든 파시즘의 질서가 개개인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으로 시작된다는 점 말이다. 게다가 시민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인간은 만인에 대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라는 철칙에 너무나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시민 사회는 인간의 “개성”을 하나의 진부한 이상으로 매도하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이런 식으로 어떤 유형적 노선에 의해서 형성된 틀에 박힌 채 구조화되..

47 Wolf 2021.11.07

크리스타 볼프: 미래의 기억 (1)

다음의 글은 크리스타 볼프의 "읽기와 쓰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마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출전 Christa Wolf: Lesen und Schreiben, Neue Sammlung, Luchterhand 1980, S. 45 - 48. ........................ 세상의 이치는 과연 무엇일까? 정말 우리 인간의 고유한 존재를 속속들이 밝혀내는 일이 세계의 참뜻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세상에 대한 가치 내지 의미 부여의 작업은 얼마든지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에 관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마구잡이로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

47 Wolf 2021.11.07

서로박: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3)

주인공은 주어진 기회를 상실한 것 외에도 병원 내에서의 자신의 모든 순응적 자세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병의 치료를 위해 쓰라린 약물을 들이켜야 한다고 말하며, 컴퓨터 진단 작업에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미 역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인공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즉 자신이 지금까지 친지들과 타인들이 강요하는 기대 욕구에 의해서 침해당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순응해 왔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골치 아픈 갈등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병은 그미로 하여금 이러한 압박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순응적 태도를..

47 Wolf 2021.06.14

서로박: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2)

친애하는 C, 죽음의 문턱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위기는 오래 전의 대학 친구이자 당의 동지인 하네스 우르반이라는 남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르반은 주인공이 병원에 이송되기 직전에 흔적 없이 잠행을 떠납니다. 나중에 주인공이 몇 주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서서히 차도를 보일 무렵, 사람들은 어디선가 우르반의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검결과 목을 매고 자살한 게 틀림없었습니다. 우르반의 부음 소식을 접한 주인공은 열병의 몽환 속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반추합니다. 원래 두 사람은 사회 정치적인 공동 작업을 통해서 동일한 이상과 목표를 추구해 왔습니다. 두 사람의 작업이 당의 경직된 질서로 인하여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었을 때, 우르반은 당에 충성하였지만, 주인공은 당의 규율에 무조건적으..

47 Wolf 2021.06.14

서로박: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1)

친애하는 C, 오늘 다루려고 하는 소설은 크리스타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Leibhaftig』(2002) 입니다. 이야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여주인공, “나”는 동베를린의 어느 종합병원에 머물면서 병든 몸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고열 때문인지, 아니면 마취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미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지나간 40년 동안 구동독에서 보낸 여러 가지 삶의 흔적들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떠올리는 상상의 현실이 풍요로운 심층의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텍스트의 토대가 되는 병원의 현실은 정확하지만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종합 병원의 일상은 일정표에 맞추어 계속 반복되니까요. 주인공은 수술을 기다리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증상 그리고 의사들이 어떻게 자신을 대하..

47 Wolf 2021.06.14

크리스타 볼프

크리스타 볼프는 1929년 3월 18일 바르테 강변의 란츠베르크에서 상인 오토 일렌펠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유년의 틀, 혹은 "유년의 문양 (Kindheitsmuster)"에 반영되었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그미의 나이는 16세였습니다. 사춘기의 나이에 어째서 전쟁이 발발했는지, 어떻게 유대인들이 핍박당했는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미의 가족들은 메클렌부르크로 이사했습니다. 란츠베르크의 모습. 건물들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으나, 주위의 풍경은 의구하기만 하다.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 데가 없습니다. ㅠㅠ 1949년: 아비투어 취득. 사회주의 통일당 (SED)에 입당했습니다. 당에 입당하는 것은 당시에는 거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949년: 그미는 예나와..

47 Wolf 2019.11.08

서로박: 볼프의 나누어진 하늘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 (Der geteilte Himmel)』은 196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작가는 198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받을 정도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그미는 사회주의의 실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구동독에서 비판을 당했습니다. 1990년 통독 후에 『남아 있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스타지 문제를 거론했을 때 작가는 신랄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쨌든 크리스타 볼프는 주제의 측면과 그리고 문체의 측면에서 구동독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작품, 『나누어진 하늘 (Der geteilte Himmel)』은 볼프의 데뷔작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50년대에 구동독의 문예지에 「모스크바 중편 (M..

47 Wolf 2019.03.09

서로박: 볼프의 "메데이아" (2)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해석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메데아"는 1996년에 간행되었다. 볼프는 메데이아 신화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신화에 의하면 메데이아는 남동생을 찢어 죽이고, 라이벌인 어느 여성을 살해하며, 급기야는 자신의 쌍둥이 아들까지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볼프는 이러한 내용을 수정하고, 메데이아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1) 볼프의 신화 수정의 내용일 뿐 아니라, (2) 소설의 주어진 현재와의 은밀한 관련성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통일된 독일에서 작가가 처한 상황을 은근히 암시할 뿐 아니라, 남성적 권위의 사회가 붕괴한 다음에 여성들이 어떠한 비참하게 피해 입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고 있다. 소설은 11개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데이아를 포..

47 Wolf 2018.08.03

서로박:볼프의 메데이아 (1)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목소리들 (Medea. Stimmen)"은 1996년 루흐터한트 출판사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1991년에 발표된 논란의 작품 "남아 있는 것 (Was bleibt)"이 발표된 지 꼭 5년만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씌어지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통독 이후 크리스타 볼프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동독 문학 연구" 제 14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볼프는 1990년까지 구동독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통독 이후에 크리스타 볼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작품 "남아 있는 것 (Was bleibt)"이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작품에서 크리스타 볼프는 슈타지에 대한 억압 구조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서독의 보수적 평론..

47 Wolf 2018.08.03

서로박: 볼프의 "유년의 본보기" (2)

6. 넬리 조단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삶: 볼프는 넬리 조단이 떠올린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일반 사람들의 반응 등을 차례로 서술해나갑니다. 이를테면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을 박살내던 수정의 밤 사건, 에스파냐에서 발생한 내전, 1939년 폴란드 침공 등은 분명히 정치적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저 신문에 보도될 뿐, 오더 강의 왼쪽에 위치한 소도시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커다란 심적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1933년 독일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광장에 모였을 때, 당국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문제는 넬리 조단의 가족들이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표현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대중 집회에 적..

47 Wolf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