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서로박: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3)

필자 (匹子) 2021. 6. 14. 09:30

주인공은 주어진 기회를 상실한 것 외에도 병원 내에서의 자신의 모든 순응적 자세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병의 치료를 위해 쓰라린 약물을 들이켜야 한다고 말하며, 컴퓨터 진단 작업에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미 역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인공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즉 자신이 지금까지 친지들과 타인들이 강요하는 기대 욕구에 의해서 침해당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순응해 왔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골치 아픈 갈등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병은 그미로 하여금 이러한 압박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순응적 태도를 내팽개치게 해줍니다. 지금까지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병원의 일상에서의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은 병으로 인하여 외부적으로 하나의 객체로 취급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주체를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자고로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인간은 가족 내지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출현하는 것은 무기력함과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현상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볼프의 작품에서 놀랍게도 자신의 의식을 더욱 첨예화시킨다는 긍정적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자신의 몸을 맡긴 상태에서 그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명의 개인적 주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주인공은 고통을 인지함으로써, 정신과 육체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육체가 병을 앓는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존하려는 육체의 전략과 같습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영역이 있어. 거기서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끼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의 영향을 받는 식으로 말이야. 한쪽은 다른 한쪽과 같아.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거지. 어쩌면 이게 고유한 영역일지도 몰라. 이를 체험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야.” (S. 97f) “영영 나이 들기 전에 주어진 현실이 흐릿해지지만, 생각하건대 마침내 어떤 진정한 현실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겨져.” (S. 100).

 

친애하는 C, 나는 앞에서 병원이 어떤 병든 사회의 거울로 비유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든 사회는 이미 언급했듯이 몰락하는 구동독을 지칭할 뿐 아니라, 계층적 수직구조로 이루어진 가부장적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질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문제는 계층적으로 썩어가는 구동독이라는 병든 국가 속에 도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개개인을 순응하게 만들고 그들의 자유를 처음부터 억누르는 전체주의적 질서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인공은 평생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체제로부터 심리적인 시달림을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지금까지 이러한 사회적 강요에 단 한 번도 완강한 자세로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병의 깊은 심연 속에서 주인공은 다음의 사항을 예리하게 인지합니다. 자신은 정부의 죄악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권력층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통한 파괴적 영향들이 자신의 언어마저 왜곡시켰다고 말입니다.

 

작품 속에는 “개인의 자유가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관철될 수 있는가?”라든가, “개인은 과연 무엇에 대항하여 저항할 것인가?”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국가는 지금까지 이른바 희망찬 인류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동의 유토피아를 내세웠으며, 개개인들을 동지애라는 미명으로 무조건 단합하게 하였습니다. 주인공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숙고합니다. 그미는 이러한 공동의 유토피아 그리고 동지애가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로 개개인의 내적인 자유를 교묘하게 압살하고 억압해 왔는가? 하고 은밀하게 문제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르반은 스스로 동지애 그리고 더 나은 새로운 도시를 찬란하게 건설하려는 강령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작심하였습니다. 주인공은 우르반의 결심에 오랫동안 동조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네스 우르반이라는 이름 속에 의미심장한 의미가 도사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네스 Hannes”라는 이름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간 “하데스 Hades”를 연상시킵니다. “우르반”은 라틴어로 “도시 urban”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우르반”은 횔덜린의 소설 『히페리온』의 인물, “알라반다와 매우 흡사합니다. 알라반다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지만, 우르반은 당에 대한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심한 회의를 느끼다가,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 않습니까? 『히페리온』 제 1부에서 국가에 관한 놀라운 사항이 편지형식을 통해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지금까지 이러한 유토피아의 실패와 이와 관련된 환멸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이상 징후가 발견된 것도 우르반의 잠적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인공은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이 완전하게 사라진 과정을 비판적으로 숙고해나갑니다. 놀라운 것은 주인공이 사회적인 모든 책임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할 때, 그미의 몸에서 비로소 병적 징후가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순간 주인공은 죽음으로 향해 서서히 흡입되기 시작한 셈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더 이상 죽음 속으로 침잠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의사들은 병원 내에서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사항을 분명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내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고통은 희망의 상실로 인한 무엇이며, 환상이 깨지고 친구들을 떠나보낼 때 느끼는 아픔, 바로 그것입니다. 그미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금 자신의 고유한 삶을 되찾으려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미는 자신이 품고 있던 희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미가 다시금 새롭게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외부의 상황 다시 말해서 사회적 정황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코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에 피곤함을 느끼는 자에게 구원의 놀라움을 전해줌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찾게 해주지요.” 이때 주인공은 반문합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코라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은 다짐합니다. 즉 고통의 흔적들을 추적해 나가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정이라고. “어떠한 방어체계도 갖추지 않은 채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코라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자신의 고유한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기회를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결국 육체적인 질병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작가는 오히려 주인공의 고통에 대해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육체적 심리적 위기는 그미로 하여금 병에 시달리게 하였으며, 병의 고통은 그미에게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삶의 의식을 일깨워줍니다. 소설의 맨 처음은 상처 입었다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말없는 탄식입니다. 주위에는 자신의 탄식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창문 바깥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시인들의 자연 묘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미는 고통 속에서 시적 언어를 새롭게 인지합니다. 괴테의 시에 나타난 죽음의 동경은 우주와 하나가 되려는 동경이며,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합치되고 싶은 갈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C,『육체에 합당하게 Leibhaftig』는 독자에게 어떤 대립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동경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 사이의 대립이며,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정황 그리고 육체와 정신 사이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우리가 이를 통해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질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평생 이른바 “육체”라는 헐거운 가죽 부대를 걸치고 살아가야 하는데, 나이 들수록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가죽 부대가 점점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오히려 나이 들수록 젊어지고 명료해지며, 더욱더 영리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육체에 합당하게”라는 제목은 이중적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이 몸이 심리 구조 그리고 두뇌 등과 상호 유기체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육체라는 가죽 부대 속에 포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소설의 제목은 -“Haft”라는 독일어 단어가 시사해주듯이- “육체에 갇힌”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목을 어떻게 번역하는 게 옳을까요?

 

정미경 교수는 볼프의 소설을 "몸앓이"라고 번역하여,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몸 앓이"도 나쁘지 않지만, 제목 속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약화시킨 게 아쉬운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