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크리스타 볼프: 미래의 기억 (2)

필자 (匹子) 2021. 11. 7. 10:54

바꾸어 말해 산문 작품은 개별적 인간에게 향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학문과 과학 기술의 영역에서 새롭게 발명된 것들이 사회적 질서에 무조건 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모든 것은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발명품에 좌지우지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항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모든 파시즘의 질서가 개개인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으로 시작된다는 점 말이다. 게다가 시민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인간은 만인에 대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라는 철칙에 너무나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시민 사회는 인간의 “개성”을 하나의 진부한 이상으로 매도하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이런 식으로 어떤 유형적 노선에 의해서 형성된 틀에 박힌 채 구조화되어 있다. 현재 살아가는 인간은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과학 기술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감행하지 못하고, 무제한적으로 순응하고, 무한정으로 교환 가능한 단순한 객체로서 내동댕이쳐져 있다. 기계와 과학에 외면당하는 인간은 감정마저 조종당하게 된다.

 

어떤 특정한 뇌의 부분에 기계의 자극을 받은 채 슬픔과 기쁨을 표시하게 되곤 하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삶은 결국 어떤 거대한 가상을 통해서 근접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가상적인 삶은 그저 인위적 자극만을 강조하고, 이러한 자극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그저 상투적 특성뿐이다. 결국 이러한 상투성만이 인간 존재의 특성으로 드러나게 되고,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삶의 상태는 역사 부재의 현실적 상태인 셈인데, 이는 결국 역사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이는 인류가 역사의 뿌리를 끊어내고, 미래의 모든 희망의 고리를 차단시키는 마지막 결과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사회주의의 지조를 지닌 산문 작가라면 이러한 명제를 의식적으로 접해야 하며 가급적이면 영향력을 지닌 저항으로써 맞받아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 논거로서 증명해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업은 오늘날에야 서서히 진실로 드러나게 되는 “진리들”의 어떤 유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류의 본질 속으로 침투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성공을 거두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결코 말로써, 문장으로써 이러한 끔찍한 과업에 참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문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본질적 뿌리와 접촉하게 하고, 자의식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의식은 고도로 발전된 과학 기술의 국가에서 너무나 무기력할 정도로 힘이 없어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살로 삶을 끝내든가, 노이로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도피하지 않는가? 신경 정신과 치료사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돌출적 행동을 접하면서 그저 심리적 예민함을 약화시키는 치료 방식을 채택하고, 기껏해야 사회적 규범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급격한 치료의 트레이닝만 시도할 뿐이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이른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슬로건에서 하나의 출구를 찾기도 한다. 그렇지만 과학 기술을 공동으로 비아냥거리는 이들의 태도 또한 낭만주의의 허튼 사고가 아닌가?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자연친화적인 삶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인류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형의 단순한 삶의 태도는 인위적으로 오래 보존되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