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크리스타 볼프의 "읽기와 쓰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마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출전 Christa Wolf: Lesen und Schreiben, Neue Sammlung, Luchterhand 1980, S. 45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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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는 과연 무엇일까? 정말 우리 인간의 고유한 존재를 속속들이 밝혀내는 일이 세계의 참뜻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세상에 대한 가치 내지 의미 부여의 작업은 얼마든지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에 관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마구잡이로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존이 바로 그러한 결정과 직결되어 있다는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린 가장 내밀한 의구심에 관해서 언급해보기로 한다. 오늘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인간의 종으로 편안히 살아남으리라고 여기는 분들이 얼마나 많을까? 다시 말해 각자에게 주어진 수명 동안에 우리가 상대적으로 구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현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전망이 과연 얼마나 충분하게 주어지는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국경으로부터 수천 킬로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인종 학살을 껄끄러워 하면서 냉담한 태도로 상대적으로 약간 방해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물의 본질”, 혹은 생물학적 과점에서의 “인간의 본성” 속에는 휴머니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모든 개개인은 사회가 수천 년 동안 어렵사리 그리고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룩해낸 것을 새롭게 하나씩 배워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 속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유형의 생명 존재를 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이 도사리고 있지 않다. 후기 시민 사회의 사람들은 냉소적 태도를 취하면서 휴머니즘을 역사와 무관한 것으로 해명하였다. 휴머니즘은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하나의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인류는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에 처해 있었으므로 같은 종에 대한 마구잡이의 폭력은 그들에게 씨를 말리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해 왔다. 사람들은 고대에 단순하게 살아가면서, 무척 흥겨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갔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기억은 우리의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동경의 상을 각인시킨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래를 기억하는 이러한 행위가 과연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00년이라는 신비로운 해의 시점에 이르게 되면 50억 내지 60억에 이르는 사람들은 과연 프랑스 혁명에 사용되던 “동지애”라는 진부한 단어에 합당한 삶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 작가들은 이러한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예기치 못하게 문학 작품의 의미를 유추하게 한다. 과연 우리가 대하는 산문 작품은 시대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 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인류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펜을 거머쥔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창작 행위에 대한 약간의 변명꺼리를 나름대로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창작의 여러 가지 개인적 모티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작가들은 외부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창작을 최상의 행위로 여길 수 있다. 물론 창작의 욕구가 전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관심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문학 작품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어떤 무엇을 제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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