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Wolf

서로박: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1)

필자 (匹子) 2021. 6. 14. 06:04

친애하는 C, 오늘 다루려고 하는 소설은 크리스타 볼프의 『육체에 합당하게 Leibhaftig』(2002) 입니다. 이야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여주인공, “나”는 동베를린의 어느 종합병원에 머물면서 병든 몸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고열 때문인지, 아니면 마취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미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지나간 40년 동안 구동독에서 보낸 여러 가지 삶의 흔적들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떠올리는 상상의 현실이 풍요로운 심층의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텍스트의 토대가 되는 병원의 현실은 정확하지만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종합 병원의 일상은 일정표에 맞추어 계속 반복되니까요. 주인공은 수술을 기다리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증상 그리고 의사들이 어떻게 자신을 대하는지를 마치 제 삼자가 조서를 쓰듯이 냉정하게 서술해나갑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간 날들에 관한 기억들 그리고 꿈이라는 황홀한 세계가 간간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가 제 삼자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서술된다면, 후자는 주체의 관점에서 화려하고도 열광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술적 관점의 구분을 감지할 수 있지만, 때로는 현재와 과거가 서로 용해되고, 환자의 주관적 상태와 객관적 상태가 마구 뒤엉키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치료를 위한 주사기가 투여되었지만, 그미는 긴급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의식을 잃기 때문입니다. 병에 시달리는 이유는 맹장염으로 인하여 체내에 병균이 침투하여 복막염으로 번졌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병세에 관해서는 소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서 그미의 나이가 약 60세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상태는 너무 빠른 심장 박동으로 인해서 엉겁결에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미의 심장박동은 특히 두려움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면 매우 빨라지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미의 강건하지 못한 육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경우 환자의 심장을 안정시키는 것은 알약밖에 없었습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도 주인공은 심장 박동의 문제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약을 충분히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그미는 지금까지 생명이 위독해지는 상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심장 박동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 주인공은 다시 의식을 되찾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미가 수술을 한 번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고열의 증상은 몸속에 염증이 도지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의사들은 정확히 어떠한 부위에 고름이 생기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컴퓨터로 환자의 신체부위를 세밀하게 진단해나가야 합니다. 진단을 위해 주인공은 일단 쓰라린 약물을 들이켜야 하는데, 이를 들이켜 마시는 것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애써 약물을 들이키지만, 끝내는 모두 토해내기 일쑤이지요. 고무로 이루어진 관은 주인공의 팔에 연결된 주사 바늘로부터 머리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 모든 장치를 마치 하나의 끔찍한 고문처럼 여깁니다. 자신이 “마치 광선으로 둘러싸인 새장” 속의 짐승과 같은 처참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한편으로는 모든 치료 과정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 다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경멸하기도 합니다. (S. 47) 검사 결과 그미는 조만간 수술 받아야 합니다. 열병으로 인하여 의식이 혼미해지자, 주인공은 다시금 비몽사몽간의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이때 마취를 담당하는 간호사인 젊은 여자가 출현합니다. 그미의 이름은 코라 바흐만입니다. 코라 바흐만은 환자와 함께 심리적으로 고통을 나누면서 몸과 마음을 위로해줍니다. 코라 바흐만은 주인공에게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낯선 여자처럼 여겨집니다. 그미는 달의 여인이자 밤의 여인으로 이해됩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코라 바흐만이라는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 Ingeborg Bachmann을 연상시킵니다.

 

치료는 컴퓨터를 통한 진단, 검사의 과정을 거쳐 수술로 이어집니다. 수술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행해집니다. 주인공은 이러한 모든 고통의 과정을 감내해야 합니다. 주인공의 곁에는 간호사 외에도 그미를 돌봐주는 파트너가 있습니다. 작가는 이 사람을 “너”라고 명명합니다. 어쩌면 생사를 오가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바로 그 남자입니다. 주치의는 자주 그미의 침상을 찾아와서 “어째서 그미의 면역 기능이 그렇게 약한가?”하고 비난을 가합니다. (S. 102). 나중에 주인공의 상태에 전혀 차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주치의는 완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병의 진행 과정을 염두에 둘 때 자신은 환자의 면역 체계의 붕괴에 관해서 의학적으로 아무 것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치의가 “붕괴”라는 단어를 뇌까렸을 때, 주인공은 부들부들 떨며 일순간 경련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반응은 환자의 심리적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수술이 끝난 다음에 의사들은 고름의 진원지를 완전히 포착했다고 말하면서, 서서히 차도가 나타나리라고 단언합니다. 물론 이러한 차도가 서방세계에서 시급하게 조달한 약을 통해서 출현하는 것을 결코 아니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병리학 연구자는 마침내 피를 오염시키는, 희귀하기 이를 데 없는 변종 박테리아를 현미경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작품 내의 수많은 언급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주인공의 몸 상태를 통해서 구동독의 붕괴 이전의 구체적 상황을 서술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동시에 크리스타 볼프는 자신의 체험 내지 구체적인 경험을 작품에 반영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소설이 다양한 토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중첩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를테면 구동독의 일상적 삶 그리고 주인공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도 소설적 토대로서 서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틀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작품이 한 인간의 어떤 치명적인 몰락 내지 붕괴를 주제화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몰락 외에도 심리적인 쇼크 그리고 이로 인한 육체적인 붕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인공의 병, 다시 말해 그미의 육체적 붕괴를 한 인간의 심리적인 위기이면서 동시에 어떤 국가의 존재론적 위기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병원은 “어떤 병든 사회의 거울”로 상징화될 수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구동독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층적 수직 구조로 이루어진 가부장적 전체주의 사회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