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홍준
수평선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철벅거리며 살아서 어느덧, 불혹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교활한 좀이 되어
세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살아가는
지금도 어떤 꿈이 있을까
돌아보면 개기름 자르르한 허리와
황금으로 걸신들린 해골박
불어터진 국수가락처럼 질척거리는 인생이
피래미새끼 한 마리 살지못하는
탁한 연못으로 누워있다
남에겐 날을 세우고 내 허물엔 관대하여
동무 하나 없는 적막한 처소에서
석쇠에 나를 굽고 있는가.
凸: 오늘은 전홍준 시인의 "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나는 노새처럼 늙어간다"에 실려 있습니다.
凹: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요?
凸: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전홍준의 디스토피아의 역설적 시정신과 관련됩니다.
凹: 어쩌면 작품 "좀"은 시대와 삶에 대한 시인의 소신이 담겨 있다는 말씀인지요?
凸: 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자기 비판의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일견 인간 삶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불신하는 것 같고, 특히 대부분 사람들이 찬양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凹: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凸: 대부분 사람은 인간 존재야말로 만물의 영장이며, 동시에 가장 고결한 도덕을 의식하고 이를 실천하려 한다고 믿고 있지요. 시인은 이에 대해 일차적으로 의혹을 품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좀"입니다. 좀벌레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곤충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쓸모없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이런 식으로 좀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凹: 그렇다면 자기 비하라는 말씀인데요.
凸: 젊은 날의 꿈과 비교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지만, 시적 자아는 꿈은커녕 탁한 연못에서 살고 있습니다. 삶의 웅덩이에서 철벅거리면서 질척거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凹: 그러니 시인은 주위 사람들과 사회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을 비하하는 게 아닙니까?
凸: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시인의 자기 비하 뿐 아나라, 지적 야수로서의 인간 존재 전체를 비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살아가는 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허리에는 개기름이 자르르 끼여 있고, 자신의 해골박은 황금에 걸신들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凹: 그래도 먹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지요?
凸: 문제는 시적 자아가 삶의 전부를 경제적 이득에 바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이 마치 불어터진 국수가락처럼 질척거린다고 생각합니다.
凹: 자고로 "대인춘풍 지기추상 (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게 행동하는 게 도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이와 반대 사항을 언급하고 있어요.
凸: 네. "남에겐 날을 세우고 내 허물엔 관대하여/ 동무 하나 없는" 존재가 바로 시인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인간 존재를 좀벌레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지요. 조금이라도 이타주의의 마음을 지녀야 친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친구의 아픔과 근심을 들어주기 위해 희생하게 하지 않습니다.
凹: 그렇다면 벌겋게 달아오른 석쇠가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비유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시인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을 석쇠 위에 얹힌 채 죽어가는 좀벌레 한 마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참담하지 않는가요?
凸: 그럴 수 있어요. 시인의 이러한 자기 부정 내지는 염세적 세계관은 개인적으로는 있는 대로 받아들이기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생명이 있는 것은/ 소멸할 때까지 그냥 사는 것/ 나머지는 다 개뿔이다." ("산다")라는 그의 시구를 생각해 보세요. 인생 무상, 허무, 절필, 죽음 - 이러한 정조가 전홍준 시인의 시적 분위기라면, 그의 문학은 허무주의의 동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전 시인이 꿈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요?
凹: 좋은 지적이기는 하나, 우리는 그의 시를 무작정 시인 개인의 염세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시에서 찬란한 유토피아적 이상이라든가, 생태주의의 시각 등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비관적 관점과 허무주의를 시인의 개인적 삶에 국한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凸: 무슨 뜻이지요?
凹: 살다 보면, 스트레이트 공격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어퍼컷의 방식도 필요합니다. 시인은 일견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교활한"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부정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 내지는 모순 등을 은근히 생각하게 합니다.
凸: 토머스 모어는 주어진 끔찍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대신에 찬란한 가상적 현실을 묘사한 바 있지요. 그런데 전홍준 시인은 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에 마치 좀벌레로 살아가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역으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 그리고 자본의 폭력을 극복해낼 수 있는 방책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게 해주지요.
凹: 적막한 처소의 변모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凸: 아닙니다. 물론 전홍준 시인의 작품은 자기 비하를 통해서 역으로 주어진 현실 그리고 통념에 대한 완강한 저항으로 읽혀질 수 있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소가 아니라, 인간관입니다.
凹: 인간 존재가 "만물의 영장"이라든가. "자연이 착취의 대상으로서의 영원한 처녀지"라는 사고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凸: 바로 그 점에 중요해요. 전홍준 시인은 이 문제를 골몰하지 않았지만, 우리 독자는 “좀벌레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사고를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생태계의 변화를 고려할 때 인간 존재의 위상은 더욱더 낮아져야 합니다.
凹: 휴머니즘을 비판하자는 말씀인가요?
凸: 거시적인 생명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인간 존재 역시 물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이 물질입니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 부패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의 고리를 반복하지요. 여기서 태동하는 게 바로 신유물론의 사고입니다. 인간은 휴머니즘의 정신을 지닌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기후를 변화시키는 80억 마리의 동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개기름 자르르한 허리와/ 황금으로 걸신들린 해골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성하지 못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凹: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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