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0. 가능성, 추구, 부정성, 시간성으로서의 “아님”: “아님”은 어떤 무엇을, 혹은 일부의 내용을 객관화시켜 이를 전달 가능한 것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존재의 그릇으로서의 “아님”은 스스로 변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과정은 다분히 지속적입니다. 왜냐면 “아님” 자체가 시간적 공간적 과정에 머물며, 스스로 그러한 과정을 설정하거나, 어떤 내용을 자신에게 실험적으로 집어넣기 때문입니다. (김진 1: 121). 블로흐는 연속적으로 새롭게 설정되는 창조를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보존으로 해명하지는 않습니다. 창조는 오히려 변모하는 의미로서의 보존이며, 나아가 사실적 핵심 내용에 대한 실험입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정착하는 “아님”이라는 행위는 역사적으로 어떤 탁월한 관점, 즉 어떤 역사적 혁신을 관철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기초적 내용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역사에 조금씩 형성되어 출현합니다. 이로써 형성의 과정은 언제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무엇, 아직 한 번도 존재한 바 없는 무엇 혹은 지평의 새로움 등을 연속적으로 발전시킵니다. 이는 과정이 유입된, 결국 일체로 흘러가려고 의도하는 지평에서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씨앗의 영글기 위한 탐험 속에는 모든 다양한 충만한 특징이 자리합니다. 게다가 새로운 무엇은 아직 찾지 못한 하나의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결핍에서 출발합니다. (BWB: 404.)
11. 아직 아님은 모든 있음을 지향한다.: 과정 속의 “아님”은 현실에서 긍정적 모습으로 정착될 때 스스로 깨어나는 부정(否定)이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모든 있음”이라는 마지막 적절한 상태를 미리 떠올린 다음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님”은 오로지 마지막 “모든 있음” 속에서 유일하게 휴식하며, 자신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완수해냅니다. “아직 아님”은 때로는 모든 이루어진 것들에 대해 파괴적 혹은 해체의 모순을 지향하는데, 이는 변증법적 물질 이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있음”의 단계는 확고한 시점으로 규정되고, 부정적 자세는 거대하게 도입된 것을 위해서 다시금 하나의 방해물로 작용해야 합니다. 왜냐면 어떠한 완성된 사물이라 하더라도 “모든 있음”으로 지향하는 과정에서는 하나의 성공적 존재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2. 마지막 결과로서의 “모두 없음”과 “모두 있음”: “모두 없음”을 통과한 변증법은 블로흐에 의하면 이미 이루어진 거대한 복합 존재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 존재는 모든 무엇이 아니라, 단순한 만물 혹은 우주로서, 말하자면 과정으로부터 일탈해 나온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종래의 철학은 순수 우주의 관점에 의해 “이루어진 존재 das Gewordensein”를 이른바 “모두 있음”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정과 역동성을 중시하는 블로흐의 존재론적 자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물은 처음에는 점성술의 신화에 의해서, 다음에는 범신론을 통해서, 나중에는 “모두 있음”의 기계의 부속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세계 및 세계에 대한 만족을 뜻하는 총체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모두 없음”을 통과한 변증법은 모든 중요한 긍정적 특성과 관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여란 변증법의 위험이 아니라, 변증법이 어떤 중요한 사항을 복제함으로써 명징한 난해함으로 작용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난해함 속에는 암흑이, 거칠고 기괴한 관련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친 암흑은 역설적으로 천국의 숭고함 및 지옥의 심원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경악이 오히려 가장 나은 부분일 수 있듯이, “모두 없음”은 모든 찬란함 그리고 모든 기약된 해결책의 고결함에다 전율과 두려움의 특징을 부여합니다. 지금까지 “모두 있음”은 우주에 대한 경탄, 권좌, 권력 그리고 영화로움 등에 의해 교묘히 감추어져 있지 않았던가요?
13. “모두 있음”으로 향하는 유토피아: 블로흐는 유토피아를 주체의 의지 속으로 그리고 세계 과정의 경향성과 잠재성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의지로 설명합니다. 파괴된 존재론은 이제 어떤 무엇이 역사에서 이른바 완전히 도달했으며, 심지어는 완결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이러한 존재론의 배후에 강렬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우리의 의식에 비친 현실적 과정의 길은 나중에, 다시 말해서 확정되고 실체화된 정태적 존재의 상실 과정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전개되는 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상승 도중에 인지되는 “모두 없음”의 도움으로 획득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길입니다.
유토피아는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아님” 그리고 이 세상 속의 없는 것의 변증법적인 변화를 포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가능성 속에서 “모두 없음”과 “모두 있음” 사이의 어떤 개방된 양자택일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결국 유토피아는 두 개의 선택 가운데 “모두 있음”이라는 존재를 찾아 나섭니다. 존재의 파토스는 이미 끝난 것으로 증명되는, 이른바 성공적으로 실존한다는 세계의 질서, 심지어는 천상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드러내지 않는가요? 그렇지만 이러한 파토스는 아직 아닌 존재 그리고 “훌륭한 최고 상태Summum bonum”를 지향하는 희망의 파토스로서 작용할 뿐입니다.
14. “모두 없음”과 “모두 있음” 사이의 변증법: 중요한 것은 전투적 낙관주의입니다. 전투적 낙관주의가 없다면,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부르주아는 함께 야만의 상태 속에서 깡그리 패망할 것이라고 블로흐는 말합니다. 전투적 낙관주의가 없다면, 넓이 그리고 깊이에 있어서 대양은 육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기나긴 밤은 찬란한 빛이 번쩍이는 동방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어떤 몹시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두 없음” 그리고 “모두 있음” 사이의 상호 교대가 가능한 하나의 대안입니다.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란 유토피아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경우를 뜻합니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와는 반대로 “자유의 나라”의 이전 상태일 것입니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지향하던 바가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경우를 뜻하거나, 아니면 유토피아와 같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모두 없음”의 최종적 승리는 신화적으로 고찰할 때 지옥이 실현된다는 뜻이며, “모두 있음”의 승리는 천국이 정말로 세상에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모두 있음”은 블로흐에 의하면 오직 자신을 되찾은 인간적 노력에 의해 성공을 쟁취한 세계와 다를 바 아닙니다. 사실 내용의 문장은 “처음에 행위가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되어, “모든 있음”의 문장은 “근접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해서 완전히 쟁취한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두 가지 문장은 물질을 향상하는 물질적 경향성의 굽은 움직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속에는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라고 하는 우리의 불변하는 의향이 내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완전체로 만나게 합니다.
15. 아직 아님과 예견 그리고 창조성: 지금까지 우리는 블로흐의 아님, 아직 아님 그리고 모두 있음 그리고 모두 없음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블로흐의 저서에 다루어지고 있는 아직 아님의 특징을 차례로 서술하려고 합니다. 블로흐가 아직 아님의 개념을 추적한 것은 젊은 시절부터였습니다. 가령 우리는 『유토피아의 정신』, 그의 박사학위 논문, 『경향성 잠재성 유토피아』 그리고 『희망의 원리』 등을 차례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GdU1, PA: 115 – 122, TLU 55 – 108, PH: 49 – 391). 아직 아님의 정서는 한편으로는 예견과 창조성, 이를테면 낮꿈과 기대하는 사고 속에 담겨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 속에 연속적으로 생동하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어떤 다른 장소에서 고유하게 출현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다. ” (Bloch, GdU1: 47). 예술적 창조성은 블로흐에 의하면 예술가가 내면에 품고 있는 모든 자발적인 욕구에서 발현합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예견은 철학자 칸트가 언급한 바 있듯이 예술가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는 행위의 근원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블로흐에 의하면 자신의 고유한 자유 그리고 아직 완결되지 않은 행복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16. 아직 아님과 예견 그리고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과 갈망: 블로흐에 의하면 삶의 모든 체험 역시 아직 아님이라는 정서에 의해 뒤덮이고 가득 채워집니다. 두냥 살아가는 순간은 우리에게 명료한 상으로 인지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통찰하지 못합니다. 어떤 유령과 같은 끔찍한 상을 떠올리면, 이러한 상은 실제 현실에서 유사한 형상으로 출현하기도 합니다. (Bloch, GdU1: 370). 말이 씨가 되듯이, 환상은 실제 현실에서 “이미 본 déjà vu” 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한 가운데에는 어떤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역은 중개의 과정에서 진취적으로 포착될 수 있고 환하게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영역은 블로흐가 말년에 발표한 저서, 『세계의 실험』에서 자세히 언급된 바 있으며, 우리에게 하나의 질서로서의 틀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인간이 “개방성으로 향하는 어떤 적절한 길을 찾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Bloch, PH: 336).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지금”이라는 순간과 뒤엉켜 있으므로, 어둡기 이를 데 없습니다. 순간은 영글지 않은 미성숙의 상태로 우리를 그냥 지나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구원의 시간으로서 아직 소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어떤 “토대 없는 놀라움” 그리고 마냥 메아리로 다가오는 “구성될 수 없는 질문”에 관해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떤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시간은 역사의 하류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장하게 흐르지는 않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는 멈출 수 있고, 때로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정체될 때도 있습니다. (Bloch, PH: 337). 인간은 난관에 봉착할 때 어떤 더 나은 공간을 예견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동시성, 혹은 모든 있음의 공동체는 확장의 개념으로 인식되지, 시간의 점진적 흐름으로 인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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