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극작가, 막스 프리쉬는 신문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진리는 직접 바라본 무엇이지, 엿듣거나 제삼자로부터 접한 사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문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1930년대 유럽에서 간행된 신문이 어떠한 이유로 가짜뉴스와 왜곡뉴스를 양산해내는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가 아니라, 후기 파시즘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블로흐의 글을 읽으면, 우리는 굥석열 정권이 얼마나 히틀러 정권과 일치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전: Ernst Bloch: Erbschaft dieser Zeit, Frankfurt a. M. 1985, S. 75 - 80).
극우파, 즉 고동색 셔츠를 입은 돌격대는 한 가지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사항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기술이다. 거만함과 오만불손의 한계에 이르면, 그들은 이러한 은폐 기술을 용인한다. 마지막으로 공무를 대리하는 사람마저도 교활하게 처신하면서 모든 것을 감춘다. 어떤 사안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사항만큼은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한다. 신문 기자 또한 그러하다. 설령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혈연과 지연을 고려하면서 어떤 거짓을 생산해낸다. 이로써 거짓은 새로운 지침에 따라 국가의 도덕이 되고, 국가의 윤리로 자리 잡게 된다. 나치 국가는 겉으로는 언론 출판의 학문적 논의 사항이라고 공언하지만, 속으로는 “편집자 법”의 시행 규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편집자 법이란 1933년에 발표된 법 (SLG: Schriftleitergesetz)을 가리킨다. 편집자 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어떤 경우에도 언론에 글을 실을 수 없다고 한다. 독일 편집인들은 진리와 반대되는 내용을 집필하는 책임감을 수용해야 했다. 그 이후로 편집자들은 공공연하게 그야말로 하찮은 내용을 아무런 부담 없이 발표하게 되었으며, 주관적 내용을 교묘하게 객관적으로 검증된 것인 양 공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권력의 개가 되어, 비굴할 정도로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언론과 출판계에서 모든 가치가 전도된 내용이 거대하게 퍼진 다음에도 가짜뉴스와 왜곡 뉴스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글은 말하자면 참과 거짓과는 전혀 무관하게 발표되는 실정이다.
우리는 상기한 내용이 거짓된 교과서에 어떻게 버젓이 실리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뮌스터라고 불리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새로 부임한 신문 방송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집필했다. 역주: 한스 아마디우스 뮌스터 (Hans Amadius Münster, 1901 – 1963): 독일의 신문방송학 연구가. 작가. 블로흐는 그의 다음과 같은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Hans Amadeus Münster: Wesen und Wirkung der Publizistik Arbeiten über die Volksbeeinflussung und geistige Volksführung aller Zeiten und Völker. Universitätsverlag Robert Noske, Leipzig 1937. “신문 방송학의 세 가지 과제.” 여기서 뮌스터 교수는 전문가들이 오목거울로 수집한 새로운 관점에서 찾아낸 지금까지의 결과를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주도적인 사항은 역사적이든 경제적이든 간에 지식이 주도적이 아니라, ‘채무 지불 정지’가 활개를 치고 있다. 지저분한 모라토리엄의 방식으로 말이다. 분명히 전하건대 ”언론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보편적 정치 교육을 수행하는 일“이며, ”정치적 선동의 유형이 필연적 사항임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뮌스터는 이러한 사전(事前) 연구 다음으로 언론의 두 번째 특수한 과제를 언급한다. 이는 바로 ”민족의 영향 그리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 토대를 둔 정신의 민족적 수행에 관한 역사적 내용을 인식하게 하는 일“을 가리킨다.
문제는 뮌스터가 신문 방송학의 세 번째 과업, 즉 언론의 이론에 관한, 상당히 의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내용에 있다. 그것은 독일 편집자 이후 세대에 관한 교육의 문제를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교육은 ”편집자 법의 요구 사항이 일치되며, 언론 출판의 요구 사항과 관련하여 독일 인민에 관한 지식 내용을 전파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뮌스터는 민족의 영향이라는 기본적 목적에 굴복하고, 괴벨스의 선동 선전이라는 기본적 목표에 복종하며, 억압당하는 방송을 두둔하고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학문을 대하는 것은 경제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일방적 관점에서 왜곡하고, 급기야는 신문 방송학의 객관적 엄정성을 타락하게 하는 처사이다. 이런 식의 가르침이 오늘날 독일 대학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신문방송에 종사하는 사람이 이런 식의 순종을 배워야 할까? 나아가 방송과 영화에 종사하는 자들이 ”진리란 튀센Thyssen이라는 재벌에 유용한 것이다.“라고 확신해야 하겠는가?
이로써 시민 사회의 신문은 나츼의 의도대로 자취를 감춘다. 종래의 신문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규정으로 인하여 마지막 수치심까지 내팽개친다. 지금까지 신문은 최소한 모든 것을 사실에 충실하게 보도함으로써, 내면에 가려져 있던 선량한 시민의 양심을 반영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신문 소유자 그리고 광고주의 관심사를 어느 정도 제어하려는 양심마저 깡그리 파기하게 된다. 이전에는 시민 계급이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동등한 기준에서 자신의 호주머니를 두둑히 채울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되면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 suum cuique“ 분배하게 할 수 있으며, 보편적 문화의 찬란한 돛이 부풀게 되리라고 믿었다. (역주) 이러한 강령은 “suum cuique tribuere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다”를 강조한 말인데, 고대로부터 계층 사회의 토대로 작용했다. 그런데 이제는 튀센이라는 재벌조차도 사업 경영이 그런 식으로 조화로운 걸음으로 진척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인민이 착취당하고 전쟁이 발발하여 그들이 곧장 시신(屍身)이 되지는 않을지 모른다. 전쟁이 발발하면 경제적 움직임은 활성화되고, 자본은 정치적 환란과 함께 시신을 넘어서 마구잡이로 변할 테니까 말이다. 이전에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그런 식의 비합리적 사업을 추진한 바 있었다. 주관적으로는 거짓과 기만술이라는 그럴듯한 무의식이 동원되었으며, 객관적으로는 문화의 흐릿한 빛이 활용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진실을 은폐하는 이러한 두 가지 면사포는 오늘날 불필요하다. 신문사의 마지막 수치심은 사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올바름을 위한 자극이라든가 진실을 발언하려는 자세는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한두 개의 거대 신문사들은 정치적 사건에 관해서 마치 출판업자 ”베데커Bädecker“가 그러했던 것처럼 멀리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하지 않았던가?
과거의 공정하고 객관적 보도 자세는 사라지고, 자본은 그야말로 냉소적인 기만술을 활용한다. (역주) 오늘날 신문사들 가운데에는 진리를 보도하려는 목표보다는 사업 경영의 이득을 목표로 하는 신문사들이 많다. 주로 건설사에서 간행되는 경제 신문이 그러하다. 이것은 일시적이지만, 진실과는 무관한 외설적 자극과 같다. 사람들은 마치 처녀들을 팔아먹으려고 입방아를 찧는 로마의 여신, 수아다와 같은 수다쟁이 저널리스트들을 요청한다. 그럴듯한 신문사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좀도둑 학교의 졸업장을 지니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혁명적인 상은 언제 나타난 적이 있는가? 하고 항변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민속 신문에 실려 있던 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은 엿보이지 않고, 혁명적 계시를 세상에 전하는 신문과 방송의 사명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이제 겨우 닳아빠지고 찢어진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영향“과 같은 추상적인 허사다. 과거에 저널리스트는 한마디로 고결하지 못한 작가 형제라고 혹평당했다면, 이제 그들은 고결한 사기꾼, 교활한 거짓말쟁이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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