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빛은 세 번에 걸쳐 타오르고, 불꽃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료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아키노의 세 번째 제국의 면모이다. 첫 번째 시대에 사람들은 구약, 법 그리고 성부에 의해서 예속된 노예로 살아간다. 이들은 바로 평신도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두 번째의 시대는 육체와 정신 사이의 중간 단계의 상태를 지칭한다. 이러한 상태는 성자 그리고 신약성서에 의해서 개방되는데, 주로 교회 그리고 사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시대라고 한다. 이제 세 번째 시대는 시계의 종말 이전의 시기인데, 조만간 우리의 앞에 출현하리라고 한다. 세 번째 제국은 수사, “영혼적인 사내viri spiritualis” 그리고 “성령의 자유”와 함께 자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은 교회 그리고 교회의 사제들과 함께 모조리 사멸하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이주하게 되리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형제와 자매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산주의의 공동체는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시대가 “두려움 그리고 설화”가 난무하는 시대이고, 두 번째 시대는 “탐사 그리고 지혜”로 가득 찬 시대라면, 세 번째 시대는 “사랑 그리고 깨달음”으로 충만한 시대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성령이 분출하여 완전하게 자리하는 강림의 축제가 만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첫 번째 시간이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었다면, 두 번째 시간은 빛이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이고, 세 번째 시간은 성령과 함께 하는 찬란한 낮이 되리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은 성부가 아니라, 인간의 아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의 혁명가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또한 19세기 황제 탄생의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생경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글을 읽고 화들짝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조아키노의 발언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채 자유의 행복을 애타게 갈구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꿈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사회주의의 이상은 상상력 넘치는 놀라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아주 이른 시기에 출현한 이러한 갈망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경제적인 관점은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조아키노의 발언에는 어떤 결코 변함없는 기본적 면모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휴머니즘 그리고 이를 애타게 기대하는 기다림의 시각, 바로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은 조아키노의 발언처럼 퍼지고 있다. “누군가 교회의 제단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동안, 가난한 자는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한다.” (아모드: 6장 12절), 그밖에 주의 노여움을 단호하게 거부하려는 욥의 저항에서 우리는 조아키노의 자세를 유추할 수 있다. 도래할 성령의 시대에 신을 모시는 수사들은 모든 욕망을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형제자매들과 모든 재화를 서로 나누게 되리라고 한다. 이는 보편적 의미에서 “사원의 소비 공산주의”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조아키노의 교단은 수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어떤 천년 왕국의 토대하에서 현세의 찬란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였다. (실제로 조아키노가 이 글을 집필했을 때는 자신의 교단을 이미 창립한 연후였다. 교단의 수사들은 영혼의 훈련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육신의 평온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4세기 말에 콘센차 출신의 텔레스포루스는 현세의 행복에 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파한 바 있다. 텔레스포루스에 의하면 신은 온 인류가 행복하로록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내면만이 아니라, “모든 눈, 귀, 모든 입, 손과 발, 모든 간이나 콩팥” 역시 인간으로 변화되는 등, 완전한 시점이 도래하게 되면, 지상의 행복이 종교적 희열과 함께 충만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텔레스포루스는 조아키노의 찬가를 노래한 바 있는데, 이는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행한 태양의 기도보다 더 열정적으로 현세에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 생기 넘치는 삶이여, 더욱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더욱더 기리고 싶은 삶이여. o vita vitalis, dulcis et amabilis, semper memorabilis.”
우리는 이러한 노래가 조아키노의 사상이 잠재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는 것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왜냐면 이러한 노래는 조아키노가 연속적으로 추구하는 지상의 새로운 행복의 목표를 종교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혼입하여 놀라울 정도로 이러한 행복의 과정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든 간에 도래하는 세상에는 신의 법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준수하는 대신에 “친구들의 자유libertas amicorum”를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조아키노 사상의 대담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아키노는 저세상에 고착된 시각을 이 세상의 미래 시대로 환치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기대하였다. 그가 주창한 것은 새로운 “영성의 형제들viri spirituales”의 자유였다. 이러한 자유는 세상을 등지는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기대감과 같다. 조아키노가 내세운 것은 기독교 사상의 엄격한 요구사항이었는데, 이는 내세와 현세를 이원론으로 구분하는 느슨한 가톨릭주의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조아키노는 제삼제국에 출현할, 종교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현세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천국, 그러니까 저세상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하는 사랑의 언어는 조아키노의 견해에 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육체성으로 체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이 새롭게 변화되면, 그리스도의 제국은 내세만을 중시하는 세계의 질서는 근본적으로 파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점이야 말로 조아키노가 내세운 과감한 사상이며, 핵심적 실체와 같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조아키노는 당시의 시대를 평가하는 최상의 재판관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선사한 셈이다.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는 조아키노의 사상을 “예언자 정신”으로 파악하여, 이를 천국에 있는 태양의 영역에 자리하는 성자의 인식으로 대치시킨 바 있다. 그러나 조아키노는 인식의 신비로운 단계이론을 벗어나서, 그 마지막 내용까지 심층적으로 체계화했다. 말하자면 단계 이론은 현세와 내세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세의 상과 함께 역사적으로 내재하는 상으로서 변화되어 있다.
조아키노에서 출발한 심령주의는 당시의 시대에 혁명적 영향을 끼칠 정도로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이는 말 그대로 신앙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성령에 합당한 성서의 해석을 가리킨다. “내면에서 가르치는 영성 외에는 아무도 가르치지 못한다.Nemo audit verbum nisi spiritu intus docente.” 이러한 정통적인 기본 사상은 바로 조아키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영성의 내면적 가르침은 기족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열광적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조아키노의 글은 수없이 읽히고 전파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내면의 언어”에 강력한 의미를 전하게 된다. 여기서 내면의 말씀에 대한 의향은 진실로 말하건대 의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빛을 밝히려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에는 다만 심령론자들을 추동하는 정신으로서, 혁명의 자극제 내지는 혁명을 갈구하는 내용에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마치 “영성을 추구하는 남자들 viri spirituales”이 미래의 공산주의 시대에 살아갈 사람들로 생각되듯이, 내면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열쇠”를 지칭하고 있다.
“신의 자식들은” 성서에 의하면 오로지 이 열쇠를 사용해야만 인간이 누리게 될 “모든 자유의 계시를 개방”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계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고 봉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사상은 경제적인 관점을 고려할 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자의 관점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드러낸다. 왜냐면 다른 종교의 신앙은 통상적으로 권력과 금력을 지닌 자의 관점 내지는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원시 기독교에 내재한 반역의 정신은 이른바 내면 추구의 방향으로 즉시 회귀하였고, 나중에는 교회의 영향으로 감추어지고 환치되었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제삼제국 내지는 새로운 나라에 관한 조아키노의 사상은 나중에 퇴색되지 않은 채 기독교 이단자들에게 생동감 넘치게 전해질 수 있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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