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후설의 현상학 비판

필자 (匹子) 2023. 1. 26. 10:31

수학자들은 미분학을 동원하여 현실의 기본적 요소들을 구성해내려고 시도했다. 이로써 신 자체는 우주의 시작으로부터 도덕적인 종말로, 다시 말해서 요청하는 영역으로 이전되고 말았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명징하게 울려 퍼지고 창세기의 모세의 이야기는 마치 축제처럼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지며, 예언자의 경정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코엔이 조물주의 존재와 그 기능을 파기한 것은 세계 창시지만 파기한 게 아니라, 수학적 구성 외부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현존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파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감각적 물질 그리고 실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처사야말로 그들이 카테고리의 논리성을 강조하다가 안타깝게 지불해야 했던 대가였다.

 

그런데 현상학자 후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심리학주의에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묘하게도 그는 의식의 토대를 고수하면서도, 존재에 작용하는 어떤 심리적 요인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의식은 어떤 “초월적인 통각transzendentale Apperception”이 아니라, 어떤 “이념의 바라봄”이라는 일원성의 카테고리와 직결되고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의식이 근본적으로 “주관주의의 잔여물”과 묘한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현상학을 무작정 “가톨릭의” 방식으로 계속 추적하여, 그 가치를 존속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는 후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도적인 모든 사고 행위는 자아가 행하는 행동이다.” 현상학은 말년의 후설의 견해에 의하면 전적으로 의식 그리고 대상관계의 이질적 방식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학문적 인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초월적인 출발점은 객관주의, 다시 말해서 논리성의 형식적 물화 현상으로부터 처음부터 아주 과도하게 설정되어 있다. 이 경우 형식적 물화 현상은 (헤르만 코엔이 추구하던 미분학의 자연과학적 관점과는 달리) 순수 수학과 접목되어 하나의 이슈로 나타나 발전을 거듭한 경우를 가리킨다.

 

첫째로 순수 논리학은 어떤 형식적 연결고리를 세부적으로 톺아본다. 뒤이어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형식 대상의 여러 카테고리를 하나씩 고찰하게 된다. 이를테면 연구 대상, 사실적 내용, 일원성, 다수의 특성, 어떤 사물에 해당되는 수 그리고 상관관계 등이 바로 그러한 형식 대상의 카테고리다. 둘째로 순수 논리학은 이러한 카테고리의 개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법칙들을 추적한다. 이를테면 삼단논법의 법칙이라든가, 다수에 관한 순수한 이론 체계 내지는 순수한 숫자의 법칙 등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로 순수 논리학의 의무 사항은 한마디로 본질적 이론 형태의 보편적 선험적 이론 그리고 이러한 형태들이 논리적으로 어떠한 상호적인 관련성을 맺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밝힘으로써 순수 논리학은 (학문 영역으로부터 그 자체 독립적인) 조건 그리고 학문으로 설정될 수 있는 관련성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순수 논리학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론 그 자체의 이론”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은 “수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유한 이상적 영역을 지니고 있다. 논리적인 것은 “최종적으로 ‘여러 가지의 개념’에 의해 축조된 순수하게 일반적인 문장들 속에서 구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가지 개념’이란 심리적 행동과 같은 계층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행동 속에서의 구체적인 토대를 지니고 있는 이념들을 가리킨다. 피타고라스 이후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진리의 수인 삼 (三)의 수 등을 생각해 보라. (...) 이러한 것들은 경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개별 사항이 아니고, 개별적인 여러 가지 사항에 관한 계층도 아니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이상적인 대상들이다. 우리가 수를 헤아릴 때라든가 명백한 판단을 내릴 때 그리고 무언가를 이념으로 포착하려고 할 때 접하는 이상적 대상들이다.(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I, S. 187f.)

 

후설이 고찰하는 순수 논리학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의미” 그리고 “의미의 카테고리”이다. 후설은 이러한 추상화되지 않은 관찰만을 중시하며, 계급 내지는 계층적 관련성으로부터 독자적인 의미 분석을 위한 “본질의 관찰”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비스마르크의 정치에서 엿보이는) 개별적 의미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의 철학이 내세우던 “3의 원형” 그리고 “미덕”과 같은) 보편적 의미 등은 순수 논리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비스마르크의 정치 그리고 피타고라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이념화의 관점에서 “이념화의 가능성das Ideierbare”만이 활개치게 될 것이다. 왜냐면 후설은 감각적인 것 뿐 아니라, 보편적인 것 또한 현상학적 관점에서 투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은 단순히 바라보면 족하고, 보편적인 것은 “카테고리”의 방식으로 고찰하면 족하다고 한다. 설령 하나의 의향이 가장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현상적으로 통찰하는 대상 가까이에서 얼마든지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후설은 서술, 감각주의 실증주의 그리고 플라톤의 “실재론” 등을 유일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영국의 유명론, 존 로크 그리고 존 스투어트 밀의 이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비판은 추상적 사고 다시 말해서 감각적 개별성을 배제하고 일탈시키는 모든 경향으로 향한다. 모든 것을 추상화시키고 개념으로 흐릿하게 변화시키는 처사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적 사고가 심리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야 할 것이다. 즉 추상적 사고는 개별적 사물들 사이의 특수한 차이를 생략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다. 이념으로 보편화하는 작업은 논리적 현상으로서 이러한 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어떤 고유한 대상을 지니는데, 보편성 자체에 관한 어쩐 독자적인 종 (種)에 관여하고 있다. 후설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순수한 논리의 영역으로부터 순수한 현상학으로 이전시켰다. 바로 이때 (특수한 무엇과 보편적인 무엇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차이 없이 바라보려는 욕구는 더욱더 강해졌다.

 

여기서 순수한 논리의 형태는 “수학적인 방법으로more mathematico” 설정된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정의에 의하면 명백한 기본적 원칙을 발전시키고, 이러한 원칙으로부터 여러 가지 다른 명제들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내어야 한다. 이에 반해 순수 현상학은 순수하게 서술된 (말하자면 수학적이 아닌) 구성 성분을 더욱더 증가시키고 확장시킨다. 그뿐 아니라 순수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카테고리의 관찰, 다시 말해서 “순수한 직관pure Intuition”을 중시하는 학문이다.

 

순수한 직관은 모든 무언가를 의도하는 대상의 “본질적 존재”를 그냥 주어져 있는 무엇으로 전환시킬 뿐이다. 고유한 질서는 결국 바로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모든 본질의 형체에 관한 하나의 질서로 존속되고 있다. 후설은 잘 알려진 수학이 아니라, 말하자면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는 질서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가 찾으려는 것은 “형상적인eidetisch” 질서, “지역의 존재론”이라는 질서의 정립이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무엇은 어떻게 단순한 직관 속으로 편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 속에는 오래 전부터 철학자들이 밝히려고 시도했던 의미심장한 날카로움이 자리하고 있는데, 후설은 이러한 의미를 그야말로 무해한 것으로 취급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의 본질적 존재는 현상학의 방식을 통해서는 결코 현존재를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수한 직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현실적 체험의 내용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의 심층적 심리적 요소는 오히려 가상이라든가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에 대한 관조”는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주어진 카테고리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떤 “가식적으로 갈망하는 의미의 카테고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식적으로 갈망이란 미덕 추구의 마음가짐 내지는 시적으로 그리고 신화적으로 주어진 대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희망 사항 등을 지칭한다.)

 

 

자고로 이상적인 본질 형체의 영역은 현존재 속에 주어져 있는 영역보다도 훨씬 포괄적이다. 이러한 광대한 영역이 도사리는데도 불구하고, 후설은 경험적 실존 그리고 모든 현실적 판단을 고려한 실존 등에 관한 필수적인 문제마저 자신의 순수 현상학에서 배제하고 말았다. 후설은 자신의 카테고리의 직관 속에 물의 요정, “운디네”와 같은 신비로운 요소를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 현상학자가 감히 실제 현실에서 운디네가 실존했거나,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문학 작품 그라고 미술 작품에서 등장하는 물의 요정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판타지로 수용하면 그만이지만, 마치 환각을 일으키는 미신의 내용은 그 자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상기한 사항을 모조리 도외시하더라도 우리;는 후설이 신플라톤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설의 본질에 대한 직관은 막스 셸러Max Scheler가 강의하던 강의실의 음습한 그림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말하자면 후설은 경험적 측면에서 세밀하지 못한 “비-대상성Gegenstandlosigkeit”을 추구함으로써 이른바 어떤 추상적 회화 작품을 현상학이라는 이론으로 개진해나갈 뿐이다. 이로써 현상학적 직관은 –어떤 다른, 현상과는 전혀 평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게슈탈트 이론에 자극을 가하게 되었다. 후설의 이론은 가령 심리학, 역사학 외에도 사회 과학의 영역에 자극을 가극을 가하게 된다. 그것은 이를테면 “광물 결정학Kristallographie”의 특징과 결부되어서, 유감스럽게도 사회적 변화의 과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통계학과도 새롭게 연결되기도 했다.

 

논리적인 무엇은 후설의 경우 이미 언급했듯이 주어진 학문 영역과는 독립적으로 지식의 조건이든가 지식의 관련성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 사항 뒤를 이어서 나타나 첨부되는 것이 바로 본질적 직관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다. 그렇기에 “사실적 과학Tatsachenwissenschaft”이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적인 학문의 국외자에 해당할 뿐이다. 그런데 “개별적인 의미의 카테고리 그리고 보편적인 의미”의 그것 사이의 관대한 차이 없음은 이로 인하여 피상적인 의미의 카테고리로 변화될 뿐이다. 그렇지만 현존재는 이른바 개별적 의미에 있어서 결코 완전히 제외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마치 국외자처럼 취급당할 수도 없다. 적어도 본질 자체가 거기서 사라지지 않는 한 더욱 그러하다.

 

보편성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철학 영역에서 제기된 바 있는데, 개별적인 것의, 혹은 보편적인 것의 현실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만약 현실에 관한 문제가 같은 정도로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근접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전에 헤르만 코엔은 “(감각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주어진 것의 완고함”에 대해 증오심을 표명했다. 코엔의 이러한 태도는 후설의 초-관념적인 “전체적 형상 이론Total-Eidetik”에 비해 충분히 측정 가능한 것이었다. 비록 후설이 직관적 충만성을 통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렇기에 실재하지 않는 무엇 또한 포함하여) “소여성Gegebenheit”으로 이해하고. 얼마든지 주어진 사실로서 고찰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개별 원리haecceitas”의 본질은 이것 존재로 머물고 있다. 그것은 결코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별 원리”가 본질적 특성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 하나의 보편성의 무소유는 결코 보편적 본질이 거기에 형성되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의 문제는 우주에 관한 물음으로서 그 자체 하나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후설의 현상학은 본연의 의미의 카테고리 그리고 본질의 카테고리를 고려할 때 현실과는 매우 낯설은 무한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후설은 특수한 현존재의 형태로서의 카테고리에 도달하지 못했다. 물론 후설의 현상학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카테고리로 가득 찬 개념의 감옥을 확장시키고, 새롭게 묘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후설이 도입한 “모든 사물 그리고 몇몇 다른 것에 관한 de omnibus rebus et de quibusdam aliis” 상(像)을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