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3) 블로흐 용어 해제

필자 (匹子) 2024. 7. 10. 10:44

(앞에서 계속됩니다. 가나다 순으로 정리함)

 

디나미스 δύνάμις 잠재적 역동성. (고대 그리스어 단어 “가능성”은 잠재적 내재성으로서의 가능성 그리고 역동적 움직임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이 단어를 잠재적 의미와 역동적 의미를 혼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가능성을 지닌 존재 δύνάμει ὅν” 그리고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 κατά το δυνατόν”라는 개념으로 이중적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었다. 만약 “δύνάμις”를 “능력”으로, “ένέργεια”를 “(운동의 힘을 뜻하는) 활동”으로 번역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찰한 잠재성과 역동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는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로고스 Logos 로기콘 Logikon [흔히 관념론은 소재와 정신을 존재론의 측면에서 서로 구분하고 있다. 블로흐의 사상은 이를 철저히 반대한다. 형태, 생명의 특성, 의향, 형체, 정신 등과 같은 논리적 구조는 블로흐에 의하면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딱딱한 고체가 아니라, 유동하고 움직이는 존재라고 한다. 관념론은 소재와 정신의 구분을 통해서 물질의 변화 가능성을 언제나 부인해 왔다. (Bloch, MA: 471). 사변적 변증법적 물질 이론은 이러한 이원론적 구분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흐는 이성에 해당하는 전통적 용어, 로고스 대신에 “이성적 특성”을 가리키는 로기콘을 사용한다.

 

물질 속에는 이러한 이성적 특성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A는 B이다.”라는 명제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데, 블로흐는 “이다” 대신에 “아직 아니다”를 사용한다. 주어든 술어든 간에 두 가지 모두 개방되지 않고, 완결되지 않은 채 마지막 동일성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물질의 목적론적 동력은 변증법적이다. 물질이 모순적 특성을 지니는 것은 고유한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변화 과정에서 “세 번째 특성은 주어지지 않는다.Tertium non datur”라고 말하면서 동일성의 원칙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블로흐는 매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동력으로서 모순이라는 특성을 내세운다. 이로써 물질 속의 존재는 블로흐에 의하면 모순이라는 변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그리고 다르게 변화된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Marxismus [흔히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요약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고는 정치 경제학의 분석에 국한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1852)에서 경제학이 혁명 행위와 자발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 바 있다. 블로흐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을 “마르크스주의의 순수 이성 비판”으로, 자본주의의 극복을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이성 비판”의 작업이라고 규정했다. (Bloch, GdU1: 407). 그런데 후자는 아직 학문적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문제는 사회의 변모 과정과 목표 의식을 확립하는 과업에 있다. 자유의 나라는 블로흐에 의하면 하나의 확정된 틀과 구도로 정해진 무엇이 아니며, 미래의 시점에 출현할 가능성의 사회상이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방성과 역동적 특성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한편으로는 계급 갈등을 해소하고 평등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의 구체적 면모를 예술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선취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보다 더 오래된 사고라고 지적했다. 왜냐면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토마스 뮌처를 예로 들 수 있듯이- 무산 계급의 폭동과 저항은 마르크스 이전의 시대에 이미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블로흐가 자신의 철학 개념을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은 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자신의 미래 철학의 핵심 사항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재확인했다는 파렌바흐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Fahrenbach: 100).

 

블로흐는 주어진 사회를 정치 경제학적으로 냉엄하게 분석하는 일을 마르크스주의의 한류라고 규정했으며, 고향, 자유의 나라를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선취하는 일을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죄르지 루카치는 1967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블로흐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천명하였다. 블로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요약되는 마르크스주의의 시스템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메시아사상이라고 한다. (Gespräche: 34). 이에 대해 오스카 넥트Oskar Negt는 루카치가 블로흐 사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혁명적 판타지”를 좌시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Materialien: 57)]

 

마지막 사건 Eschaton [마지막 사건은 천년왕국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구원에 대한 기대감 즉 메시아사상과 관련된다. 블로흐는 이를테면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난 세계 창조 그리고 데미우르고스보다는 신약성서의 마지막 문헌인 요한 계시록을 더욱 중시한다. 왜냐면 이는 전통적으로 이어온 종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다시 이어가는 (Re + ligio)” 알파의 과업보다는, 마지막에 도래하게 될, 오메가로서의 새로운 세상의 개벽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블로흐는 “처음의 사건 Proton” 보다 “마지막 사건”을 중요한 것으로 판단한다. (Bloch AC: 195).

 

요한 계시록은 세상에 종말이 도래하면, 세상에는 끔찍한 파국이 도래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파국은 블로흐에 의하면 혁명으로 인해 변화되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혼란과 파국에 대한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는 요한 계시록을 “모든 도둑 대장이 속임수를 부리는 포대기”라고 혹평했지만, 토마스 뮌처는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마지막 사건은 뮌처에 의하면 새로운 천국, 새로운 지상을 마련해주는 토대라는 것이다.]

 

모든 게 공동 소유이다. Omnia sunt communia [이것은 플라톤의 방대한 대화 문집 『국가 Πολιτεία』에 실려 있는 문장이다. 플라톤은 최상의 국가를 논하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계층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지배자 계급Αρχοντες”, “군인 계급Φλακες” 그리고 “평민 계급 Δεμιυργοι”으로 나누어지는데, 플라톤은 계층과 신분의 차이는 천부적 사항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무도 세습으로 이어지는 계층 내지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플라톤이 말하는 “모든 게 공동 소유다.”라는 말은 이를테면 군인 계급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신분을 뛰어넘을 수 없는 명제이다. 그런데도 신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문장은 놀랍게도 모든 인간, 즉 “만인”에게 통용되는 평등사상으로 수용되었다. 이를테면 독일에서 농민 전쟁을 이끌었던 토마스 뮌처는 “특정 계층의 공동 소유”를 만인의 공동 소유라고 잘못 수용하였다. 특정 계층 속의 공동 소유는 만인의 공동 소유와는 다르다. 블로흐는 이를 “창조적 오해 kreatives Mißverständnis”의 전형적 범례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무신론 Atheismus [블로흐의 무신론은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권능을 거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신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숙명적 억압을 강요하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무한한 권능을 지닌 신들은 권력자를 수호하는 존재들이었다. 예컨대 로마 독재자들은 기독교도를 향해 “이 무신론자들 hoi atheoi”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왜냐면 기독교도들은 체제를 뒷받침하는 권력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인간 신 예수를 숭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Bloch, PH: 1527).

 

블로흐의 무신론적 입장은 포이어바흐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더 나은 세상의 실현 가능성의 여러 가지 범례를 특히 유대교 기독교 신앙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신을 기리는 마음은 우리를 자유의 나라, 평등한 사회적 삶을 완성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신은 없지만, 신에 대한 신앙심은 기능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 구원을 갈구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 정서,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무신론은 가진 자와 권력자의 무지막지한 탄압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해방의 운동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목표는 신의 막강한 권한 없이도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치는 찬란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블로흐에 의하면 바로 “초월 없는 초월 행위transzendieren ohne Transzendenz”라고 말할 수 있다. (Bloch, TE: 356).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는 블로흐에 의하면 신을 용인하지 않는 유토피아 사상의 실체, 바로 그것이다. 블로흐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해방의 가장 구체적 범례로 피력하고, 원시 기독교의 신앙을 “사랑의 공산주의”라고 규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Bloch, LV: 459).]

 

(10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