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 블로흐 용어 해제

필자 (匹子) 2024. 7. 9. 10:32

(앞에서 계속됩니다.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구체적 유토피아 konkrete Utopie [블로흐는 전체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토피아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토피아를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나타난 일련의 사고를 규정하였다. 오언과 푸리에 그리고 생시몽과 카베Cabet 등은 더 나은 사회를 설계했지만, 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사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블로흐는 유토피아를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난 일회적 사상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주의가 구체적 유토피아라는 사실은 용인될 수 있지만, 차제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유토피아의 유형이 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블로흐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회 변화 이후의 바람직한 상태를 지칭한다. (박설호 1: 183). 가령 우리는 모든 것을 필요성에 의해서 생산하는 평등한 사회인 마르크스의 자유의 나라를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블로흐의 논거에 의하면 오늘날 생태주의 유토피아 역시 얼마든지 구체적 유토피아의 범례로 이해될 수 있다.]

 

궁극성 Ultimatum [궁극성은 하나의 한계 개념에 해당하는데, 실존 그리고 진수 사이의 마지막 동질성을 암시해주는 용어이다. 블로흐에 의하면 현존재가 존재로 형성되는 궁극적 시점에는 외연성Dass그리고 내포성Was사이의 마지막 동질성의 상이 드러나게 된다. 블로흐는 이러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고향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궁극성은 모든 목표 내용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실현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변증법적 돌출의 상이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궁극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완전한 내용의 변증법적 돌출은 새로운 무엇이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궁극성이라는 카테고리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갈구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목표 내용은 바로 여기서 더이상 반복되지 않게 될 것이다.(Bloch, PH: 234). 블로흐는 튀빙겐 철학 서언에서 궁극성을 인간의 도덕과의 관련성 속에서 재론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도덕은 블로흐에 의하면 시시포스의 영원한 바위 굴리기도 아니고, 장 폴 사르트르가 강조하는 철저히 반-강제적인 자율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희망의 성취를 위한 단호하고 처절한 자세를 견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검은 리본의 낙관주의라는 것이다. (Bloch, TE: 166).]

 

그냥 살아가는 순간의 어두움 Dunkel des gelebten Augenblicks [그냥 살아가는 순간의 어두움은 블로흐 철학의 출발이다. 그냥 살아간다는 말은 무언가를 충분히 체험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허송한다는 말이다. 블로흐는 헤겔의 다음과 같은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즉 잘 알려진 무엇은 더 이상 인식된 무엇이 아니라는 명제 말이다. “우리가 막연히 살아가는 순수한 현재는 아직 진정한 현재라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현재를 구체적으로 중개하여 의미를 따지는 작업일 것이다. 여기서 예술 작품이 좋은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왜냐면 예술 작품은 성취된 순간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취된 순간을 체험하는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순간이 지나가거나, 순간을 기대할 때 시간의 단면을 인지할 뿐이다. 세계에는 통상적으로 어둠이 스쳐 지나간다.” (Bloch, TLU: 386).

 

블로흐는 막연히 살아가는 순간의 어두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의 상황을 예로 든다. 어느 청년은 음침하고 곰팡이 가득한 방으로 들어서는데, 이 순간에 그는 낯선 불안에 사로잡힌다. 블로흐는 이러한 순간을 그냥 살아가는 순간의 어두움이라고 해명한다. 청년은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할 뿐, 삶에서 진정한 무엇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인간은 지금 여기에서 허기와 결핍을 인지한다. 이때 의식되는 것은 굶주림을 떨치기 위한 앞걸음이며, 여기서 진정한 미래로 향하는 전선이 형성된다. 이때 작동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근원으로서의 지금이라는 순간의 어두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에 합당한 배경으로서의 개방성이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험하는 순간의 어두움 속에서 작동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존재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어째서 우리가 찬란한 유토피아의 존재로 삶을 구가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Bloch, EM: 31).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분명히 인지될 때 계급의식과 변화의 필요성을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근거 Grund [근거는 블로흐에 의하면 첫째로 논리적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과 관계의 의미에서 하나의 결과로 끌어낼 수 있는 원천으로 이해된다. 만약 어떤 충분한 근거가 주어질 경우, 어떤 결과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블로흐는 이를 “충분한 이유의 원칙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라고 명명하였다. 둘째로 근거는 블로흐에게는 이성 그리고 실존, 이성과 집중성 사이의 역설적인 결합이다. 여기서 말하는 집중성이란 비-논리적 특성을 지니는데, 이는 “비-근거Un-Grund”를 가리킨다. 근거가 내포성이라면, 비-근거는 외연성으로 명명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외연Daß”을 참고하라.) )

 

비-근거는 블로흐가 에크하르트 선사, 야콥 뵈메 그리고 셸링에게서 차용한 개념이다. 현존하는 무엇의 근거는 “비-근거 Un-Grund”, 원초적 토대, 혹은 심연 등을 가리키는데,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은폐되어 있는 무엇이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선사는 비-근거의 개념을 인간의 의지 내지는 추구하는 의향과 연결했다. 블로흐는 에크하르트 선사의 “비-근거”를 “외연의 자극Daß-Anstoß”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기독교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이단자를 배출했다는 점이다. Das Beste, was das Christentum hervorgebracht hat, sind seine Ketzer.” [사막의 오아시스에 고인 물이 그렇게 소중하게 인지되듯이, 우리는 힘들고 각박한 삶을 통해서 드물게 찾아오는 기쁨의 강도를 깊이 체득한다. 기독교 사상 역시 그러하다. 기독교 신앙은 폭정과 고통과 가난이라는 쓰라림 속에서 저항의 불꽃으로 피어오른다. 기독교의 힘은 블로흐에 의하면 억압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저항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뜨겁게 분출된다. 블로흐는 핍박과 고통의 삶에서 기독교의 저항적 에너지를 분출한 자들이 이단자들이라고 말했다. 이단파라고 해서 무조건 옹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이비 종파인 시몬 마구스 Simon Magus그리고 사바타이 츠비Schabbtai Zvi 등의 거짓된 신앙을 배제해야 할 것이다. 저항의 믿음에 관한 예로서 블로흐는 기독교 속의 무신론Der Atheismus im Christentum중세에 출현했던 수많은 이단 종파 그리고 이들의 순교 등을 차례로 거론한다.]

 

기체 (基体) Substrat [기체는 아래쪽에 가로놓인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 단어 ποκείμενον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물질의 토대로 물질의 터를 받쳐주는 무엇으로 이해된 바 있다. 이로써 라틴어의 Substratum은 아래쪽에 놓여 있는 무엇이라는 의미로 이어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성질이나 상태의 기초로서 성질이나 상태를 받쳐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기체의 특징은 고정된 주체 내지는 객체의 의미가 다분히 섞여 있으므로, 기체는 언제나 딱딱한 고체의 변화하지 않는 특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와 관련되는 사항을 히포케이메논ποκείμενον이라고 표현했다. 히포케이메논은 주어진 현상 배후에 자리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으로서, 기체와 동의어이다. 기체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한 철학자는 셸링이었다. 셸링은 자연 철학에서 기체의 고체의 특징 그리고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는 셸링에 의하면 끝없이 생동하면서, 형태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는 시간과 독립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와 변모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블로흐는 셸링의 세계영혼에 관한 사고에 착안하여 자신의 고유한 아직 아님의 존재론을 도출해내었다.]

 

나치가 수여한 유일한 명예 훈장은 국적 박탈이었다.Die einzige von den Nazis verliehene Ehrenmedaille war der Entzug der Staatsangehörigkeit.” [이 문장은 블로흐의 저서 이 시대의 유산Erbschaft dieser Zeit에 실려 있다. 체제 비판자에게는 국적 박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말해서 진정한 명예일 수 있다. 춘추시대의 사상가, 유하혜柳下惠는 말했다. “살다 보면 교도소에도 들락거릴 수 있는 법, 부모와 가족을 떠나 멀리 떠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나치는 블로흐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끔찍한 폭력을 드러내었으므로,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낮꿈과 밤꿈 Tagtraum und Nachttraum [프로이트는 꿈이라는 형상에서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은폐된 존재를 읽으려고 했다. 무의식은 인간 영혼의 내면의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블로흐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밤꿈의 특성으로 규정하면서, 이와는 다른 낮에 꾸는 꿈을 추적하고 있다. 백일몽, 즉 낮꿈 속에는 블로흐에 의하면 어떤 더 나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Bloch, PH: 1616). 그렇기에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있는 어떤 사실에 관한 꿈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유토피아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14장에서 낮꿈의 세 가지 특징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첫째로 낮꿈 속에는 자아가 검열당하지 않은 채 생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일몽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둘째로 낮꿈 속에는 개인적 심리적 성욕이 아니라, 자신 앞에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이 명징하게 인지된다. 이와 관련하여 밤꿈이 아편과 조현병과 비교될 수 있다면, 낮꿈은 대마초와 편집적 광증이라는 놀라운 특징을 지닌다. 셋째로 낮꿈 속에는 세상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로써 낮꿈은 역사적 변화 과정을 자극하며, 사회적 에너지, “폭발하는 소재로서 연속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Bloch, PA: 169).]

 

누우메나 noumena [누우메나는 현상의 영역과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통상적으로 예지계라고 명명된다. 칸트는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현상계 phenomena”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Bloch, MA: 62). 칸트는 현상계를 넘어서는 영역. 사물 자체의 세계를 누우메나로 지칭하였다. 이로써 누리는 누우메나가 참과 거짓에 관한 판단이 불가능한 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