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물질 Materie (블로흐는 물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물질은 유형일 뿐 아니라, 유토피아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갈구하는 고유한 실체를 가리킵니다. 수많은 것들 속에서는 실체가 변화된 형체 내지는 조직 형태들이 풀어 헤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실체는 산출되는 자연, 산출하는 자연으로서 구원의 실험실 속에 완전한 내용으로 화덕 위에 놓여 있습니다. 최종적 물질 – 그것은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세계의 토대입니다.” (Bloch, TE: 234). 이 점을 고려한다면 물질은 유기질과 무기질에 해당하는 삼라만상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 그리고 인간이 역사와 문화 등을 모조리 포함하는 카테고리로 이해된다. 여기서 사물과 의식을 이원론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완전히 파기되어 있다. 모든 “물질은 객관적 현실적 유토피아의 실체다.” (Bloch, LdM: 412).
불로흐에게 물질은 스피노자가 말한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산출하는 자연”은 창조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창조되는 무엇으로서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과 같다. 왜냐면 그것은 -한스 하인츠 홀츠Hans Heinz Holz도 지적한 바 있듯이- 한편으로는 끝없이 사물을 창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원인causa sui”에 의해 끝없이 창조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산출하는 자연은 첫 번째 작용자이며, 아직 스스로의 존재를 찾으려는 과정에 위치하고 있다. (Materialien; 284). ]
물질 이론 Materialismus [블로흐의 물질 이론은 세계에 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상이다. 블로흐는 이른바 인간 존재와 외부의 세계를 구분하는 데카르트 방식의 이원론을 배격한다. 인간 역시 자연과 세계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유물론적 구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의식은 물질 이론이라는 대 개념 속에 편입된다. 물질을 이끄는 힘은 이미 언급했듯이 “아직 아님”이라는 성향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물질은 모든 사물을 배태하는 모체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로 드러나는 세계인 것이다.
물질의 의향은 더 나은 무엇으로 화하려는 유토피아의 에너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의 변증법의 실체로서의 물질은 중개될 수 있는 ‘새로운 무엇Novum’이다.” (Bloch, LdM: 441).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반대 개념, 유심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자체 마르크스주의와 직결되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에서 모호함을 불러일으킨다. 왜냐면 물질 속에는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또한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존재 그리고 의식, 다시 말해서 세계 그리고 인간을 모조리 포괄한다. 21세기에 제기된 신유물론은 -새로운 물질 이론으로 명명되어야 마땅한데- 인간과 세계를 이원론이라는 별개의 사항으로 규정짓지 않고 하나로 통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셸링과 블로흐의 철학적 논거와 연결되고 있다.]
미학 Ästhetik [블로흐의 예술론은 관념 미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블로흐는 자신의 고유한 미학을 집중적으로 천착하지는 않았다. 예술 작품은 자신의 사상을 전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보상받지 못한 무엇 ein Unabgegoltenes”을 생생히 전해준다고 한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세계의 과정을 미래의 관점에서 예측해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예술은 블로흐에 의하면 희망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왜냐면 그것은 세계 과정에 자리하는 어떤 보상받지 못한 무엇을 생동하게 하며, 예술의 수용자로 하여금 미래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상을 선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BWB: 14).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노력에서 필요한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뿐 아니라, 문학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Bloch, LA: 136). 왜냐면 문학 작품 속에는 미래 사회의 가능한 범례가 예술적 차원에서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블로흐의 미학적 관점은 미래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방향을 추가로 제시한다. 이로써 그것은 펄학적 사유에서 아직 풍족되지 못한 빈 공간, 개방성, 단편성 그리고 예술을 뛰어넘는 제반 현상 등을 인지하게 해준다. 블로흐 미학에 나타나는 기능에 관해서는 “예측된 상”을 참고하라.]
발아(発芽)하는 불확정성 inquiétude poussant [이 용어는 라이프니츠가 단자의 특성을 설명할 때 내세운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단자는 연금술의 공간 대신에 빛의 영속적인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로써 단자는 다섯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존재는 심리적인 에너지의 점들 (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자들은 내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거울에 비친, 제반 단자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경향성 그리고 “열망appetitus”이다.
셋째로 이러한 경향성은 그 자체 “발아하는 불확정성 inquiétude poussant”이다. 주위의 공간이 비좁을 때 단자들은 비약하면서 밖으로 이동해 나온다. 넷째로 경향성은 내재적으로 분명한 원인을 지닌 채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다. 이러한 방향은 다분히 목적론적이다.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목적론적인 방향을 “무지의 망명”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다섯째 라이프니츠는 변모 내지는 과정을 진지하게 사고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나타날 가능성의 개념을 개방시키고 있다. 가능성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단자 속에 담긴 “성향dispositio”이며 동시에 “주어진 세계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가능성의 끝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블로흐는 라이프니츠의 이 단어를 통해서 경향성의 의미를 더욱 첨예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Bloch, PH: 1007).]
법(法)의 눈(眼)은 지배 계급의 얼굴에 박혀 있다. (자연법: 525) [노자는 무위 앞에서는 성문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세상이 전문화되고, 인간 사이의 평등 관계가 허물어지자, 법 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인류 최초의 법이 로마법이었다. 로마법은 한마디로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울피아누스는 로마법에서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언급했는데, 이는 가진 자의 권익을 공고히 하기 위한 허사로 인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남성과 여성, 교육자와 피교육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서 후자가 아니라, 전자의 권리를 옹호한다. 이는 한마디로 법 자체가 처음부터 “상징 폭력violence symbolique”을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부르디외, 피에르,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이상길 역, 그린비 2015, 497).
상징 폭력을 단적으로 시사해주는 표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De civitas Dei』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어느 해적은 알렉산더 대제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나는 배 한 척 가지고 도둑질하므로, 해적이라 불리지만, 당신은 군함대를 가지고 도둑질하므로, 황제라고 불립니다..” (Aurelius Augustinus, Vom Gottesstaat IX, 4, Zwei Bde,, München 1997, S. 173.). 이런 식으로 법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행위 능력facultas agendi”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행위 규범norma agendi”을 선호한다.
오늘날에도 교도소에 힘없고 돈 없는 수인(囚人)들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실천하는 법 때문이다. 진정한 법은 블로흐에 의하면 법과 판례를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이야말로 “민주주의 없이는 사회주의가 존속되기 어렵고, 사회주의 없이는 민주주의가 실천되기 힘들다.”라는 오스카 넥트의 말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Oscar Negt: 616,). 왜냐면 가지지 못한 자, 배우지 못한 자의 기본적 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만,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의 토대는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 Ästhetik [블로흐는 미학을 독자적 영역으로 파악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착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예술에 관한 블로흐의 철학적 논의는 블로흐의 전집 속에 이미 포함하고 있다. 예술 작품은 블로흐에 의하면 감각의 제반 관련성을 중개해주는 매개체이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영역 자체가 세계의 과정을 예견으로 반영한 미래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예술은 필수 불가결하게 희망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예술 작품은 한편으로는 세계의 과정에서 어떤 아직 보상받지 못한 무엇을 생기 넘치게 표현한다. 나아가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수용자의 인지 가능성을 확장하여서, 어떤 가능성이 실제 현실에서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으며, 선취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BWB: 14), 따라서 블로흐가 자신의 사상 속에 함축적으로 반영한 미학은 우리를 미래 인식을 위한 놀랍고도 혁신적인 길로 안내하고 있다.]
변증법 Dialektik [변증법은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의 변화 과정에서 전개되는 논리성이다. 현실의 변화 과정에서 대립 명제는 종합으로 지양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로써 변증법적 결과는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역사적 운동에서 종결되는 게 아니라, 항상 개방되어 있다. 블로흐의 이러한 입장은 헤겔이 서술한 변증법적 과정과는 약간 다르다. 물론 블로흐는 헤겔의 문헌을 분석하면서, 변증법을 “부정성을 내재하는 개념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순과 관련되는 움직임이라는 유형이다. 헤겔은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오로지 “모순의 움직임 그리고 변화 과정”만을 하나의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Bloch, SO: 122).
이에 비하면 블로흐가 생각하는 변증법의 운동은 –알렉산드르 게르첸Alexander Herzen의 표현을 빌면- “혁명의 대수학Algebra der Revolution”이며, 거시적이며 통시적인 “비전의 변증법”으로 이해된다. (문광훈: 알렉산드르 게르첸 읽기, 아카넷 2024, 497쪽). 블로흐는 변증법의 표현 방식을 고려할 때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괴테의 『파우스트』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행적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 제 2부는 자신의 의지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시민 계급의 의식을 표현한다고 한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쿠자누스와 셸링이 추적한 바 있는 지식의 갈래 내지는 인식 행위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섭렵하고 있다. (Bloch, TE: 66).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괴테와 마찬가지로 “정신이라는 주체가 자신의 가장 적절한 목표 지점, 즉 신적 존재로서의 객체에 도달하는가?” 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Bloch, SO: 60).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의 구조에서 드러나는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변증법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순간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과 물질 사이의 이러한 진동 네지는 떨림은 인간의 인식 행위 그리고 세계의 변화 과정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Bloch, SO: 199).]
(10까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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