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번역은 참으로 어렵다. 철학 연구자 동료들에게 문의하여 많은 것을 수정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자가 발견된다. 누구든 아래의 해제를 접하고 비판해주면 고맙겠다.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다.)
가능성 Möglichkeit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성의 개념을 두 가지 서로 다른 특성으로 규정하였다. 그 하나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 δύνάμει ὅν”이며, 다른 하나는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 κατά το δυνατόν”를 가리킨다. 디나미스는 한편으로는 존재 속에 정태적으로 가려져 있는 잠재적 특징을,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변화를 위해 움직이려는 역동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김진 3: 102). 블로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가능성의 잠재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이를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적용하려고 했다.
이는 블로흐가 언급한 한류와 난류의 시각과 관련된다. 한류가 지금 여기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한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 작업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면, 난류는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를 예술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선취하는 일을 가리킨다. (Bloch, EM: 141). 가능성은 주어진 현실을 둘러싼 고유하고도 거대한 존재 방식이며,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잠재적인 내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로써 유형화될 수 있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경향성과 잠재성의 세계에서 주관적 동인뿐 아니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동인의 측면일 것이다. 블로흐는 가능성 개념을 발전시켜서 아직 아닌 존재에 관한 독특한 존재론을 구명하였다. “아직 아님”은 물질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래지향적 갈망을 유도해낸다. 아직 아닌 존재는 인간 사회의 적극적 에너지인데, 과정에서 원래의 존재 내용을 외부로 드러내려고 의도한다. (HWP, Bd 6: 89).]
경향성 Tendenz (블로흐는 경향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즉 경향성이란 존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충동이라는) 강렬한 질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핵심 속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어떤 논리성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블로흐의 “아직 아님Noch-Nicht”의 존재론에 의하면 아직 실질적 존재의 면모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수한 무엇 속에는 존재의 실질적 면모를 찾으려는 경향성이라는 의향이 자리한다.
블로흐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서 경향성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의미를 도출해낸다. “만물에는 행동하는 특성이 자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객관적 변화 가능성을 말해준다. 경향성은 존재가 어떤 다른 무엇으로 향해 나아가려는 성향이 아닐 수 없다.” (Bloch, LV: 126) 인용문을 고려하면 경향성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들의) 발화하는 불확정성”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는다. 블로흐는 1936년 프라하에서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진리란 경향성과 잠재성을 포괄적으로 모사해낼 때 발견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Bloch, TLU: 260). 경향성은 “외연의 토대Daß-Grund”과 “내포성Washeit”이라는 두 개의 긴장 관계를 이끄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약하건대 경향성은 변모와 변화를 추동하는 존재의 의향에 관한 객관적 특징이다.]
고정된 지금 nunc stans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를 통해서 이 단어의 의미를 숙고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인간의 시간 그리고 신의 시간을 구분하였다. 인간은 수많은 현재를 마치 모래알처럼 흘려보내지만, 불사의 존재는 항상 “영원으로서의 지금nunc permanens”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시간인 영원을 인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최소한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영겁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강렬한 순간이야말로 고정된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 선사는 인간 또한 비록 순간이지만 기도를 통한 심리적 결집을 통해서 영원으로서의 지금을 체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고정된 지금은 (발터 벤야민이 추적한 바 있는) 심리적 집중을 통한 응집된 현재의 시간, “지금 시간Jetzt-Zeit”과 묘하게 연결될 수 있다. (박설호 2: 225).]
고향 Heimat [고향은 블로흐에게는 인간이 아직 지니지 못한 무엇, 당도하지 못한 영역을 가리킨다. 그는 『희망의 원리』에서 고향을 하나의 예측된 상으로 선취하면서, 고향을 그러한 상으로 향하는 여정(旅程)으로 구명하였다. 고향이란 무조건 유년 시절의 안온한 아르카디아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지리학적으로 당도할 수 있는 공간 내지는 정태적 의미의 목적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내면에 자리하는, “아직 아님”이라는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속적으로 근접해나가는 역동적 과정을 가리킨다. (Bloch, PH: 8).
인간은 고향을 찾기 위해서 끝없이 무언가를 구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 이를 고려하면 고향이란 과거의 아르카디아도, 기존하는 무엇도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동지애의 처녀지이며, 자연 친화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고향이란 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의 비유에 의하면 “자신과 함께 떠나 vade mecum” 나중에 맞이할 수 있는 보물창고를 가리킨다.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할 때 인간이 고향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소외 없는 삶을 추구하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블로흐에 의하면 “결코 편안함을 보장해주지 않는 용기”라고 한다. (Bloch, PH: 1625).]
과정 Prozess [블로흐의 철학은 과정의 사상으로 명명될 수 있다. 왜냐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과정의 특성이 중요한 카테고리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Bloch, PA: 401). 세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의 실험에 의한 어떤 과정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세계의 변화는 “만물은 흐른다.πάντα ρχει”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발언처럼 마치 근원의 샘으로부터 대양으로 향해 흘러가는 물의 흐름처럼 진행된다. 세계의 변화는 작위적이 아니라, 인간의 인위적 노력과 함께 진척된다. 블로흐는 물질의 개념이 세계 속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물질의 개념은 물질이 “변증법적 과정에서 도출되는 현실적 가능성의 실체”가 된다. 물질은 가능성 속에 도사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를 개방시키려고 한다.
과정의 근원은 발효하는 무엇 내지는 강력하게 밀치는 물과 같다. 현-존재는 원래의 근본적인 특징을 아직 담지 않는데, 과정은 이것이 변화되도록 자극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어떤 무엇이 지금 여기에 생략된 경우를 생각해 보라. 결핍의 상태는 세계의 정수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과정은 앞으로 향해 아무런 방해 없이 자동으로 진척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고, 많은 우회로를 거치면서 그물로 엉킨 “방행적인pedatisch” 걸음을 계속한다. (Bloch, EM: 132). 과정이 향하는 곳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최상의 가장 완전한 영역이다.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곳은 객체가 해방된 주체 곁에서, 주체가 소외되지 않은 객체 곁에서 서로 만나는 마지막 지점이다. (Bloch, SO: 510).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신을 만난 인간이 성공리에 되찾은 세계와 함께 하는 동일성이다. (Bloch, PH: 368). 개방된 과정은 일직선의 걸음을 걸어가지 않는다. 블로흐는 『이 시대의 유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는 일-직선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역사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다양한 리듬과 다양한 공간이며,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완전히 파기되지 않은 가장자리의 면모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Bloch, EdZ: 68). 그렇기에 역사적 과정은 완강하고 위험한 운행이며, 고통과 방향, 수많은 우회로를 거쳐서 숨어 있는 고향을 찾는 걸음걸이라고 한다.]
구성될 수 없는 질문 die unkonstruierbare Frage: 인간은 주어진 삶에서 명징한 무엇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가 순간의 어두움 속으로 자주 침잠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현존재의 수수께끼는 먼 공간이 아니라, 가까운 장소에서 어두컴컴한 비밀로 남아 있다. 체험하는 순간순간은 우리에게 명징한 인식을 안겨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어떤 기이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물음은 어떤 시스템이라든가 프레임에 의해서 도출되지 않는 순간적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이 떠오를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순간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갈구하게 된다.
바로 이때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예견하는 상이다. 이것은 하나의 질문 속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경험이다. 그런데 체험하는 순간은 두 가지 목표 내용을 지닌다. 그 하나는 마치 신을 파악하려는 신비적 자세와 같은 태도를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특히 후자는 물질의 변화 과정과 묘하게 접목할 수 있다. (Burghart Schmidt: Ernst Bloch, Stuttgart 1985, S. 55.) 인간의 사상과 감정은 지금 여기라는 조건 속에 제한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신을 파악하려는 애타는 노력 그리고 물질의 핵심을 꿰뚫어 보려는 직접적인 체험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나중에 인간은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을 접함으로써, 차제에 하나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난제를 극복하게 된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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