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20. “아직 아님”의 세 가지 특징 (1) 현존재는 존재를 지향한다: 블로흐는 아직 아님이라는 과정 철학적 카테고리의 특징을 세 가지 사항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가능한 구원의 실험실Laboratorium possibilis salutis”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아직 아님”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차제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에 관한 문제는 마치 멀리 보이는 지평처럼 분명히 설정되어 있습니다. 블로흐는 현존재가 나중에 존재로 변모하는 것을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언젠가 하이데거는 존재의 구분과 차이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정태적으로 구명하였는데, 블로흐는 이를 비판합니다. 존재는 블로흐에 의하면 한 번도 현재 현실에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그저 현존재에 의존해 왔다고 합니다. 현존재를 관통하는 존재에 관한 이론은 오로지 다음의 사항만을 말해줍니다. 즉 서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존재는 앞으로 향해 개방되어 있는 존재의 의미 그리고 순서를 포괄합니다. 현존재는 적어도 그것이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한 “존재에 대한 실험”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21. “아직 아님”의 세 가지 특징 (2): 아님은 없음이 아니다: 둘째로 블로흐는 무(無)를 “아님”과 철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Bloch, TE: 218ff). 아직 아님은 아님, 다시 말해서 결핍에 대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무언가 부족한 상태는 마치 굶주림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없음”과는 다른 처지를 가리킵니다. 모두 없다는 것은 모두 있다는 상태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황이지요. “아직 아님”이란 변모 그리고 진보 (퇴보?)에 대한 전제 조건이며, 뒤바뀔 가능성을 지닌 상태 내지는 이에 관한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아직 아님”은 이미 언급했듯이 역사적 과정, 물질의 경향성을 중개하고, 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역동적으로 기능합니다. 이에 대한 핵심적 표현이 바로 “주어(S)는 아직 술어(P)가 아니다.”입니다. 이에 비해 “없음”은 하나의 절대적 카테고리로서 역사적 과정이 “‘모두 있음’ 내부의 있음”으로 끝나지 않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직 아님”이 역사적 과정 속의 경향성이라면, “모두 있음”과 “모두 없음”은 세계의 잠재성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역사적으로 중개되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의 특징을 드러나는 부정은 바로 악(悪)을 가리킵니다.
악은 역사적 과정에 개입할 수는 있지만, 존재론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마지막 목표를 실추시키는 무엇입니다. 실패와 희망 사이에는 어떠한 변증법적 고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죄악의 힘은 블로흐에 의하면 선의 힘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도 않고, 능동적으로 파기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Manfred Riedel: Tradition und Utopie. Ernst Blochs Philosophie im Licht unserer geschichtlichen Denkerfahrung, Frankfurt a. M. 1994, 323). 이는 역사 그리고 마지막 목표 사이에서 나타나는 긴장 관계일 수 있습니다.
22. “아직 아님”의 세 가지 특징 (2): 니힐리즘 비판: 셋째로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니힐리즘을 비판합니다. 니힐리즘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몰락하는 부르주아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어떤 다른 질서로 이전되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이는 “아님”으로서의 부정적 발전과 관련됩니다. 지배 계급의 수구적인 의식에는 변화의 계기라든가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필연성이 그저 “없음”이라는 표현으로 미화되어 있을 뿐입니다. (BWB: 411).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와 현존재를 철저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로흐의 경우 구원이란 현존재를 존재로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난 무엇입니다. 존재는 한 번도 현재에 고스란히 출현한 바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해명합니다. 현존하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로 교환되는 형체의 다양한 면모로서 그저 하나의 순서로 파악되고 있을 뿐입니다. 즉 현존하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앞으로 향하는 개방적인 존재의 의미”로 해명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로써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현존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범위로 확장되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존재론적 실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아님”과 “없음”이 동일시되어야만 무산계급의 역사적 진보에 재를 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 존재의 기본적 학문이 아니라, 실체와 행위의 콤플렉스로 파악된다면 (rebus sic fluentibus), 이 역시 니힐리즘과 함께 몰락하는 부르주아의 의식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니힐리즘 속에는 철학에서의 중요한 핵심 사항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 괴로움 그리고 절망의 심층부를 정확하게 포착할 기회를 마련해줍니다. 그렇기에 니힐리즘은 검은 리본을 달고 있는 낙관주의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Bloch, TE: 241).
23. 결론: 아직 아님은 희망 철학의 기본적 면모를 알려준다. “아직 아님”은 유토피아의 사고가 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확신이 아니라, 미래 사회에 관한 급진적인 상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의 토대 위에는 도래할 시대의 최상의 내용이 자리하면서도 환멸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하나의 개방적 특징으로 해명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습득한 희망docta spes”으로서 단시간에 (혹은 주어진 당대에) 해결책을 안겨주지 않는 희망의 특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BWB: 412).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조아키노 피오레의 천년왕국설에서 어떤 이념의 출현을 도출해냅니다. 조아키노는 천년 왕국을 꿈꾸면서, “모든 있음 속의 있음 Alles in allem”이라는 신비로운 공동체를 갈구하였습니다. 이상적 공동체는 이암불로스, 모어, 캄파넬라의 기이한 섬을 통해서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초월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투영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는 조아키노의 경우 단순히 사회 유토피아에 국한되지 않고, 신비로운 민주주의 내지는 친구 공동체의 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는 공동체의 상은 종교적 믿음이라는 알림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블로흐에게 천년왕국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러한 과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자리하지만, 유토피아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방향성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천상으로 향하는 초월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노정입니다.
그렇기에 천년왕국설에 대한 블로흐의 시각은 정치적 혁신을 위한 사고에 대한 하나의 비유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친구들의 사회societas amicorum”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과거에 나타난 제반 갈망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블로흐는 독일 신비주의, 평신도 운동 등에 나타난 생동감 넘치는 구원의 사고를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갈망의 기대감으로 이해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는 혁명의 잠재성은 신앙의 기대감 속에서 망각되지 않은 채 생동하고 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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