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3) 희망의 원리, 제 5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18. 05:39

(22에서 계속됩니다.)

 

10. 문제는 인민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다, 혹은 마르크스주의: 지금도 사람들은 저열하게 살아가고, 노예로 취급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버림받고 조롱당하는 존재로 만드는 모든 구체적 현실 상황을 설계하고 이를 변화시키는 일이야말로 급선무일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 구조의 변화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지금도 누군가 하찮은 개처럼 푸대접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참는 것 – 이는 스스로 저열한 존재, 모욕당하는 존재로서 비인간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설호: 꿈괴 저항을 위하여.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1, 울력 2011, 서문). 마르틴 루터는 모든 폭력을 나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가 군주의 폭력을 용인하고, 저항적 폭력을 비난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거짓된 평화 추종주의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지 못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양극화된 비인간적 현상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사상입니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면, 우리는 사악한 이웃으로부터 해방되고, 억압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희망을 청취해야 합니다. “이성Vernunft”이라는 단어가 청각적 의미를 지닌 까닭은 그것이 “듣는다vernehmen”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오늘 속에 생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갈구한 바는 수많은 낮꿈 속에 그리고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지평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은폐되어 있으며, 그 핵심 사항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 본질 그리고 존재의 지향성은 존재의 동인 속에서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고정된 지금nunc stans”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것은 보에티우스가 말한 대로 영원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응축된 시간으로서 모든 바램을 성취하려는 충동적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Rudolf Eislerf: Wörterbuch der philosophischen Begriffe, Band 1. Berlin 1904, S. 325-328). 고정된 지금은 때로는 갈망의 유토피아의 흐릿한 모습으로서 잠시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다.

 

11. 최고선은 지상을 “고향”으로 만들려는 의향과 관련되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훌륭한 최고 상태”의 삶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궁핍함을 떨쳐버리려고 최고선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최고선은 하늘나라이며, 신의 나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블로흐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훌륭한 최고 상태를 발견하려 합니다. 사회주의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므로,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천할 수 있는 이상입니다. 그것은 당위성으로서의 사상이며, 그 자체 인간 삶의 목표와 관련됩니다.

 

삶의 목표는 블로흐에 의하면 “무엇을 위한 무엇 Quid pro Quo”, 다시 말해서 최고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길이며 목표입니다. 왜냐면 최고선이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면서, 아울러 그리로 향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과정 속에는 이미 목표를 포함하는 궁극적 실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목표라는 자궁 속에는 과정이라는 아기가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과정은 미래에 출현할 무엇을 암시해주고 그리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블로흐에 의하면 변모의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은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습니다. 진정한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출발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미래의 시점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블로흐의 좌우명, “변모 속의 존재 Sein im Werden”는 목표를 포괄하는 과정으로서의 이상이며, 블로흐가 추구하는 “고향 Heimat”의 개념과 같습니다.

 

12. 블로흐 사상의 세 가지 특징: 마지막으로 우리는 블로흐 사상의 네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블로흐는 플라톤의 이른바 과거 지향적인 “재 기억ἀνάμνησις” 이론을 부정하면서, 희망이라는 기대 정서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둘째로. 블로흐는 국가 소설에 나타나는 유토피아 모델 뿐 아니라, 인간적 갈망의 특징을 유토피아의 성분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유토피아의 개념은 더욱 포괄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기능적으로 더욱 예리한 역동성을 견지하게 됩니다. 셋째로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념의 지향성을 고려하여 종교적 예술적 의향을 정치 경제학적 그리고 철학적 이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비근항 예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논의되는 자유의 나라와 서로 접목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인식이란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데아는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 내지는 영원한 상으로서의 이념입니다. 진리는 과거에 있었으므로, 인간은 플라톤에 의하면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그저 다시 기억해내면 족할 뿐이라고 합니다. (Lee Sang-In: Platons Anamnesis in den frühen und mittleren Dialogen. In: Antike und Abendland 46, 2000, S. 115.) “달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nihil novi sub luna.”라든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υπήρχαν λόγια” 등과 같은 전언은 블로흐에 의하면 오로지 근원만을 숙명론적으로 강화하는 문장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이러한 문장은 과거의 진리를 파악하면, 모든 것은 종결된다는 근원 중심의 숙명론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13. 재기억 이론에는 과거 지향적 반동주의가 숨어 있다.: 문제는 재기억 이론이 정치적으로 과거 지향적 반동주의를 정당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과거 사실 자체는 무작정 파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황금의 시대에 대한 추적은 그 자체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미래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를 비판적으로 추적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문제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화로움에 대한 맹목적 동경에 있습니다. 가령 후기 낭만주의의 작가들은 과거에서 현재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판적 촉수를 찾은 게 아니라, 과거 자체를 하나의 바람직한 이상의 시대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피와 토양Blut und Boden”을 중시하며, 찬란한 과거를 막무가내로 동경했습니다.

 

이러한 과거지향적인 동경은 근본적으로 원전 숭배의 경향과 관련됩니다. 오리게네스와 같은 원전을 숭배하는 자들은 과거의 문헌 내지는 지나간 역사를 하나의 철칙으로 여깁니다. 그밖에 로마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일갈하곤 했습니다. “달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Nihil novi sub luna.” 이러한 역사적 숙명론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즉 “진리는 오로지 과거 속에서 도출된다.”라든가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만 파악하면 족하다.”는 생각은 결국 일종의 원전 숭배 사상 내지는 반동주의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재기억Ανάμνησης” 이론으로 귀결됩니다. 반동주의 내지는 보수주의의 특성은 근본적으로 체제 안주 내지는 복지부동의 경향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2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