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5) 희망의 원리. 제 5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26. 08:07

(24에서 계속됩니다.)

 

20. 『희망의 원리』에 도사린 문제점 (1): 첫 번째로 “사회주의”의 이상은 하나의 도덕적 당위성입니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 기존 사회주의는 구체적 실천의 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소련, 중국, 북한 등을 생각해 보세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과거의 문헌이므로, 국가적 차원의 사회주의 몰락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하지는 못합니다. 즉 기독교의 이상은 오늘날 존속되고 있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천년에 걸친 교회의 수많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까닭은 종교가 항상 갈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사람들은 기존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사회주의의 이상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면 사회주의는 갈망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과 직결되는 당의정 알약이라고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은 유토피아의 사고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학 기술이 생태계 파괴와 관련된다면, 우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새로운 갈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생태주의 유토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이상은 전적으로 배격될 수는 없습니다. 만인이 자유롭고도 평등한 삶을 누리는 것은 인류의 오랜 갈망이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시도된 사회주의가 실패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새로운 유형으로서의 유토피아의 사고가 요청될 수 있어야 합니다.

 

21. 희망의 중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블로흐는 1960년대 초 튀빙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현재성 사이의 변증법적 결합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은 유연하지 못한 긴장 상태를 파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긴장 상태를 더욱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블로흐에 의하면 확신이 아닙니다. 희망의 정서 속에는 패배, 파멸 그리고 사멸이라는 까다로운 싹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희망은 때로는 환멸을 태동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역사적 과정 그리고 세계의 과정에서 아직 결정되지 못한 갈등과 모순의 전선에서 버티고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도 완전히 파기되지 않고, 어떤 무엇을 성공리에 완수하지 않은 채 가까이 작용하는 게 바로 인간 내면에 주어진 희망의 정서라고 합니다. (Bloch: LA: 387).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희망은 미래에 어떤 행운의 감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태도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제로 합니다.

 

희망은 꿈과 저항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부정의 부정이라는 비판적 자세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낙관하지 않는 희망” (테리 이글턴)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환멸을 처음부터 포괄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의 희망의 철학을 논하면서 블로흐는 절망과 확신을 상호 반대되는 정서로 규정하면서도, 절망과 확신에는 어떤 개방적 특징이 생략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Von Ernst Bloch und Gabriel Marcel, Bloch-Almanach 1, Baden-Baden 1981, S. 124.)

 

22. 학제적 관점으로서의 이념의 지향성. 사회주의의 이상과 기독교의 이상은 다른 차원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평등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공산주의는 의식의 지향성에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블로흐의 연구는 제반 영역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관계론”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영역 속에는 인간의 갈망이 하나의 공통적인 구도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을 신학, 정치 경제학, 역사학 그리고 철학과 예술의 영역들을 독립적으로 일탈시켜 따로따로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학제적 관련성interdisziplinäre Forschung이 요청됩니다. 유토피아에 관한 학제적 연구는 무엇보다도 문학, 철학 그리고 신학 사이의 영역 구분을 파기함으로써 진척될 수 있습니다. 학문 연구는 개별 사항으로 따로따로 진척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 경제학의 근본적 문제는 실질적 인간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제반 사회 개혁적인 목표 설정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두 가지 모두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괴테의 『파우스트』는 과정의 유토피아를 고려할 때 헤겔의 『정신 현상학』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 영역은 상호 관련성 속에서 탐구되고 교류되어야 마땅합니다.

 

23. 『희망의 원리』에 도사린 문제점 (2) 『희망의 원리』에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철학적 문헌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블로흐는 여기서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 – 1924)의 산문 작품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카프카는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거대 시스템 속에서 이용당하고, 피해당하는 개인의 비극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가입니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 자체 내적 깊이를 지니며, 처음부터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요청합니다. 블로흐는 카프카 문학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블로흐는 카프카 문학을 『희망의 원리』에서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20세기의 국가 시스템은 개개인의 사적인 삶을 끊임없이 방해해 왔습니다. 이로써 나타난 것이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 - 1950),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1894 - 1963), 예브게니 자먀찐 (Евгений Замятин, 1884 - 1937) 등이 다룬 바 있는 부정적 유토피아 내지는 디스토피아입니다. 그런데도 블로흐는 이에 관한 언급 내지는 극복 가능성 등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디스토피아 내지는 부정적 유토피아는 블로흐에 의하면 긍정적 유토피아의 범주에 포함되는 소개념에 속합니다. 왜냐면 더 나은 삶에 관한 인간의 꿈은 긍정적이고 찬란한 사회 설계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암울한 경고의 상을 통해서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끔찍하고 부정적인 현실상의 배후에는 어떤 반대급부로서의 찬란하고, 바람직한 현실의 상이 은근히 숨어 있습니다. 만약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라는 동전의 뒷면이라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블로흐에 의하면 그 의향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블로흐는 디스토피아를 별도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유토피아의 정신Geist der Utopie』에서 “”마르크스, 죽음의 극복 그리고 묵시록“을 통한 긍정성을 강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Ernst Bloch: GdU2: 433).

 

24, 『희망의 원리』에 도사린 문제점 (3) 블로흐는 지나간 시대의 철학자입니다. 오늘날의 이슈는 블로흐가 처했던 시대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을 역사적 비판적 시각에서 고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블로흐는 “자연 주체”에 관해서 논의를 개진하였으며, 핵에너지에 관해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핵이 생명체에 얼마나 끔찍한 해악을 가하는지 당시에는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한스 요나스 (Hans Jonas, 1903 - 1993)는 『책임의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요나스에 의하면 오늘날 절실한 윤리의식은 희망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속성으로서의 “새로운 무엇 Novum”이 전적으로 배격되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생태계 파괴 현상은 20세기 중엽부터 지구상의 당면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현상으로서, 인간의 갈망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블로흐의 희망 철학을 배격할 게 아니라, 블로흐가 지적한 바 있는 자연 주체의 개념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에너지 고갈, 생태계 파괴 등을 극복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구체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요나스의 “책임 의식”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 1903 - 1969)와 귄터 쿠네르트 (Günter Kunert, 1929 - )등이 내세우는 “참된 절망” 역시 인간의 자기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사고입니다. 그러나 참된 절망의 인식은 인류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절규일 뿐입니다. 생태주의 유토피아는 이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접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