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2) 희망의 원리. 제 5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15. 11:15

(21에서 계속됩니다.)

 

5 모든 종교는 창시자를 지니고 있다: 종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정한 한 사람에 의해서 조직됩니다. 무언가를 믿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성스러운 남자를 미리 설정합니다. 창시자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지니거나, 창조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시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불분명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고대의 종교 창시자들은 역사시대 이전에 살았습니다. 가령 카드모스, 오르페우스 그리고 누마 폼필리우스는 어떠한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당시의 관습에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나타날 때까지 창시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고대의 종교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자연력과 결부되어 있는데, 창시자의 모습이 강조될 수 없었습니다. 신들은 자연 존재이므로, 저세상에서도 인간적 특징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앙을 갈구하는 자의 배후에는 부분적으로 점성술의 신화와 같이 숙명론적으로 지배구조의 고수하려는 열망이 자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배구조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망을 실천하게 하고 실현하는 분이 바로 구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6. 사랑의 공산주의와 자유의 나라: 블로흐는 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즉 신은 인간 영혼이 유토피아적으로 꿈꾸는 완전 현실태로서의 “엔텔레케이아”이며, 천국은 인간 영혼이 유토피아로 상상하는 신의 세계에 대한 완전 현실태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더 나은 현세의 삶 그리고 죽음을 극복한 내세의 삶에 대한 갈망에서 출현한 것들입니다. 위대한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를 미리 찾으려는 최전선의 의향을 고수하며, 그것을 급진적으로 동경합니다. (블로흐: 희망의 원리, 2794).

 

예수가 추구했던 원시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민들의 협동적 삶, 다시 말해서 사랑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가 추적했던 자유의 나라, 필요에 의해서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경제적 공산주의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권력자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송충이는 뽕잎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컨대 플라톤은 『국가Politeia』에서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 주어라Suum cuique tribuere.”하고 말하면서, 분수에 맞게 자족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 순응적 구분과 차단은 일반 사람들에게 자기만족의 체념만을 강화하고, 불의에 둔감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제반 영역의 철저한 구분과 배척은 상호 관련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권력 이데올로기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게 분화된 제반 영역의 폐쇄적 구분과 차단을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블로흐는 학문적 폐쇄주의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신을 갈구하려는 마음가짐은 블로흐에 의하면 인문학에서 추구하는 갈망의 의미 ㄱ리고 철학에서 논의되는 최고선이라는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7. 어떤 경우에도 자포자기하지 않으리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가지 종교를 통해서 극복되곤 합니다. 이로써 내세에도 축복의 삶을 누리고 싶은 갈망은 죽어가는, 혹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계속 생동하게 됩니다. 종교 속에 담긴 모든 축복의 말씀은 죽음과 운명에 대항할 정도로 완강합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굳건한 믿음을 통해서 죽음과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냅니다. 모든 종교가 죽음 이후의 상을 구체적으로 갈구하고 형상화하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영생을 갈구하는 믿음 속에는 단순히 저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는 욕망뿐 아니라, 인간 존재가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지게 되리라는 허망함과 공허함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훼손되지 않으리라,non omnis confundar.”는 발언은 인간의 관점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언은 모든 종교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블로흐, 희망의 원리: 2490쪽.) 이러한 전언은 죽음으로 인한 궁극적 절망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신앙의 최종적 의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8.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의 신앙이 중요하다.: 유대교 이후부터 메시아사상이 종교의 커다란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것은 오메가, 다시 말해서 미래의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개혁과 개벽의 신앙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원시 종교는 처음부터 완전히 정해져 있는 수동적 목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세 이후에 나타나는 종교, 즉 유대교와 기독교 등은 인간의 희망을 역동적으로 완성해내는 능동적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갈구하는 신앙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원시적 자연 종교가 원초적인 무엇으로 되돌아가려는 알파 신앙에 근거하는 데 비해, 유대교 이후에 발전된 종교들은 오메가로서의 신앙, 다시 말해서 죽음 이후의 미래 지향적인 축복이라는 찬란한 생활을 갈구합니다. 자연 종교가 죽은 다음에 근원적인 무엇과의 “재결합 (re + ligio)”이라는 전통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데 비해서,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는 오메가, 다시 말해서 “마지막 사실Eschaton”로서의 종말론적인 새로운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태초의 알파 대신에 “궁극성Ultimum”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9. 메시아 신앙은 유토피아의 기대감이다. 세상의 구원자를 찾으려는 애타는 믿음은 천년왕국설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는 계시의 사상이며, 모세에 의해서 나타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의 전투적 이원론을 거쳐서, 기독교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부활과 내세는 블로흐에 의하면 “혁명적 변화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저세상”과 관계되는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삶과 관련됩니다. 블로흐가 말하는 기독교 사상은 원시기독교를 전제로 하는 것일 뿐, 사도 바울 (Paulus von Tarsus, ? - AD. 60) 이후에 변질된 교회와는 현격한 차이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혁명적 상으로서의 마지막 사건Eschaton 그리고 사랑의 공산주의를 주창하였다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회개 그리고 내세를 강조하였습니다. 가령 스파르타쿠스는 8000명의 노예들과 함께 노예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끝내 "로마로 향하는 도로 Via Appia"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처형당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가난한 천민들의 공산주의의 삶을 추구하다가, 로마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십자가에 목박혀 죽었습니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자청하여, 다시 말해서 스스로 원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합니다. (Bloch: AC: 223).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저세상에서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은 죽은 뒤에 보상을 받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였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회개와 내세를 위한 수단으로 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