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1) 희망의 원리. 제 5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13. 10:11

(20에서 계속됩니다.)

 

1. 마지막 다섯 번째 강의: 이번에는 희망의 원리 제 5권을 요약하고, 마지막에는 희망의 원리에 반영된 블로흐의 기본적 사상을 서술하려고 합니다. 블로흐가 설정한 학문 영역 속에는 인간이 갈구하는 갈망의 모티프가 은폐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심리학, 역사학, 그리고 소시민의 삶에 반영된 은폐된 욕구, 과학 기술 영역에서 추구된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 건축과 지리학적 유토피아, 문학과 회화 그리고 음악이라는 예술의 영역에 명시적으로 그리고 묵시적으로 반영된 꿈과 기대 정시 등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역은 내용상으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특징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기대 지평과 의향을 고려한다면,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종교의 영역 속에도 인간이 추구하는 갈망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통 그리고 영생에 대한 기대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Bloch: AC: 230). 이 점을 고려할 때 블로흐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무척 넓은 폭을 지니고 있지만, 20세기 이후에 서양에서는 오로지 신학적 차원에서 블로흐를 활발하게 수용된 바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블로흐에게서 찾아낸 해방신학이라는 사상적 모티프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2. 죽음 이후의 영혼과 세계: 블로흐는 죽음과 종교의 영역에 도사리고 있는 희망의 특징을 서술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기독교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두 번의 죽음의 과정을 거칩니다. 첫 번째 과정은 생명이 끊어지는 경우이며, 두 번째 죽음의 과정은 천국, 혹은 지옥의 거처를 선택받는 시기라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양자택일은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지옥에 머무는 자들의 참혹한 고통과 처절한 시름을 자주 묘사한 바 있는데, 이러한 죽음 이후의 세계는 기독교 이전에는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사후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죽은 뒤에 처벌받거나, 보상받는 것은 계몽된 사람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빈틈없는 영속성의 법칙에 죽음을 적용했습니다. 죽음이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하나의 이행으로서 명확한 상상으로부터 명확한 상상으로 이전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이 사멸하면, 모든 단자는 심리적으로 잠든 상태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Lessing1769년에 고대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 Wie die Alten den Tod gebildet?라는 팸플릿을 발표했습니다. (Johann Gotthold Ephraim Lessing, Wie die Alten den Tod gebildet. Eine Abhandlung, Berlin 1769.) 죽음은 레싱에 의하면 숙명의 모래시계, 저승사자의 낫과 같은 끔찍한 절망을 뜻하는 게 아니라, 축복받은 횃불을 든 정령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세계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데, 종교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암울한 숙명을 강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레싱은 죽음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숙명적 절망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3. 영혼에 관한 괴테의 견해: 나중에 괴테는 레싱의 논문을 찬양했습니다. 논문은 평온한 잠으로서의 죽음을 미학적으로 개진하며, 중세의 끔찍한 해골에 관한 지옥이 상을 떨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혼의 방황에 관한 괴테의 사고입니다. 괴테는 인간이 사망한 다음에 그 영혼이 어떻게 방황하는지를 오랫동안 숙고하였습니다. 영혼은 괴테에 의하면 죽은 뒤에 마치 거대한 공장과 같은 우주에서 영향을 끼치는데, 우주의 사건들이 죽은 영혼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나이든 괴테는 행여나 미완성의 작품을 남기고 죽을까 몹시 불안해했으며, 자신의 영혼 역시 다르게 변화될지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Bloch, PH: 1349).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영혼 불멸에 관해서 고찰하면서, 주어진 존재의 공간과 도덕적 요구의 공간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영혼이 머무는 공간은 선한 이성이 추구하는 도덕적 요청을 담고 있는 공간과는 별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레싱과 괴테가 오랫동안 추정한 방황하는 영혼의 장소는 근본적으로 칸트가 말한 도덕적 요구의 공간과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영혼이 추구하는 바는 선한 이성이 지향하는 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약하건대 계몽주의 이후로 사필귀정으로서의 죽음 이후의 삶은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의 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4. 죽음과 신앙: 죽음처럼 인간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수의 (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라는 속담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죽으면, 아무런 재화를 지니지도 않으며, 활용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동전 한 닢을 망자의 입속에 넣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굶주림을 달래라는 살아있는 사람의 눈물겨운 작은 소망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서 그리고 전설을 통해서 죽지 않는 존재, 즉 신을 상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죽음 이후의 세계상을 시대별로 나누어 해명합니다. (1) 고대 이집트 시대 사람들은 지 명부의 세계. 음습한 배경 속의 그림자들을 유추했습니다.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 모이라의 권능은 막강합니다, (2) 기독교의 세계상에 의하면 천국은 찬란하고, 지옥은 유황불에 휩싸인 끔찍한 공간입니다. 그리스의 카산드라는 숙명νάγκη을 전하지만, 니네베의 요나는 뉘우침과 반성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변화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인의 삶은 운명이라는 사슬을 비켜나지 않지만, 기독교의 세계는 삶의 인위적 변화가 회개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Bloch, PH: 1513).

 

(3) 무함마드의 천당: 꾸란은 신구약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모세의 유대교, 예수의 기독교 그리고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는 그 뿌리가 같습니다. (4) -우주론에 입각해 있는 불교의 열반: 고통의 배척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삭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죽음이 괴로운 게 아니라, 죽음과 탄생, 탄생과 죽음의 과정이 인간에게 번거로운 고통을 안겨줍니다.

 

(2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