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0) 희망의 원리. 제 4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8. 14:41

(19에서 계속됩니다.)

 

18. 고대인들이 꿈꾼 죽음 이후의 세계, 오르페우스의 바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태양 아래에 번창하는 이 세상의 삶과 반대되는 곳이었습니다. 폼페이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있습니다. “비명을 읽는 친구여, 좋은 삶을 살아가거라. 죽은 뒤에는 웃음도, 농담도 그리고 기쁨도 없으니까.” 기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저세상이란 지하의 황량한 공간, 때로는 어떠한 목적도 의지도 자리하지 않는 공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죽는 자는 망각의 강,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지옥의 강 (STYX)은 삶과 죽음을 분리합니다. 그러면 뱃사공 샤론은 죽은 자들을 지하명부로 데리고 갑니다.

 

지하명부라고 해서 무조건 끔찍하고 사악한 분위기가 자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의 아랫부분에는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음험함이 자리하지만. 그곳의 윗부분에는 잿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장소도 있습니다. 마치 봄날의 정원과 같이 은은한 여명이 퍼져나가는 곳이 지하명부의 낙원입니다. (Bloch, PH: 1310). 그밖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과 죽음을 오르페우스의 바퀴로 비유하였습니다. 삶과 죽음은 바퀴의 움직임과 함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인간 존재가 실체를 보존하고, 죽음을 견뎌내면서, 더 높은 단계로 되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레우시스 비교 의식은 데메테르 여신을 숭배하면서 재탄생을 기리는 제사였습니다. 가령 페르제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되지만, 언제나 반복해서 그의 품을 빠져나옵니다. 영혼, 즉 프시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디오니소스 신이 전하는 “출생의 순환κύκλος γέννησης”과 관련됩니다.

 

19. 신비적 직관과 그노시스의 천국 여행: 고대 로마 사람들은 동방으로부터 유입된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때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직전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신비적 직관으로 죽은 자를 기리는 제사가 성행하였습니다. 신비적 직관의 입장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절실한 갈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여행하는데, 여기에는 죽음에 대항하는 갈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일곱 행성의 궤도가 위치하는데, 사악한 영혼 내지는 세계 군주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향할 때 일곱 명의 집정관을 거쳐야 합니다.

 

게다가 항성의 영역에는 12궁이라고 불리는 수대(獣帯)가 존재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12개의 별자리는 몰락을 추구하는 악령들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기원후 3세기의 마니 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저세상의 관문을 거친 영혼들은 악덕뿐 아니라, 전생의 모든 특징을 파기해야 합니다. 달은 생명력과 영양을, 수성은 탐욕을, 금성은 성욕을, 화성은 전투적 만용을, 태양은 지적 능력을, 목성은 명예욕을, 토성은 나태함을 죽은 자의 거친 영혼으로부터 되돌려받는다고 합니다. 이로써 영혼은 천국의 입구에서 순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서게 됩니다. (Bloch, PH: 1317).

 

기독교 역시 그노시스의 천국 여행을 모조리 파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바 있듯이 천국 아래의 사악한 집정관들을 추방시켰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죽음을 하강이 아니라, 상승의 과정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노시스의 천국 여행의 과정은 죽어야 하는 운명에 대항하는 해방의 신화라는 가장 기이한 의미를 전해줍니다.

 

20. 이집트의 무덤 속에 담긴 천국: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을 진정한 삶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관에 주문(呪文)을 넣어두거나, 갑충석(甲虫石)을 시신의 가슴 아래 묶어두곤 했습니다. 죽음의 심판관은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단 다음에 영혼이 거주할 좋은 곳, 아니면 나쁜 곳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의 서기(書記)인 토트는 판결을 기술하며, 오시리스가 재판을 진행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영혼, “카Ka”인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채 동요하는 존재입니다, “카”는 밤이 되면 마치 새처럼 성스러운 휴식의 장소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숭고한 마음으로 죽은 자를 미라에 보관하면, 시신과 카는 미라 속에서 영원히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Bloch, PH: 1322).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곳에는 섬, 운하 그리고 대양이 있는데,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 제 방향대로 운행한다고 합니다.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역시 이러한 상상에 근거히여 축조된 것입니다. 이로써 죽은 자의 시신과 영혼은 오시리스 신의 보살핌 아래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삶을 위해서 미라로 봉합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돌로 변한다는 것은 고대 이집트 예술 속에 반영된 “완전성으로서의 죽음의 수정(水晶)”이라는 상입니다.

 

21. 부활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 유대인들에게 죽은 뒤의 삶에 관한 신앙은 자신의 절망감을 가라앉힐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비록 이승에서 신의 정의가 없더라도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구현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기독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기독교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최후의 심판을 통한 새롭게 다시 태어나리라는 믿음입니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 죽음은 최후의 심판일에 감내하는 지옥의 형벌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다음에 세계가 온통 화염에 휩싸이는 마지막 날에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람, 선하게 살아온 교인들은 두 번째 죽음의 저주를 극복하고, 천국에서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Bloch, PH: 1330).

 

여기서 천국과 지옥의 상은 너무나 커다란 차이를 지닙니다. 지옥은 말 그대로 고통스러운 저주의 장소입니다. 고문 바퀴, 살을 파고드는 쇠막대기, 능지처참의 형벌, 마녀의 화형대 등은 지옥의 끔찍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정의의 실현을 담고 있는 기독교의 묵시록은 인간이 갈구하는 가장 강력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서의 기본적 카테고리로서 “빛 그리고 삶 φως και ζωή”에 대한 갈망입니다. 성서는 추악한 지옥의 동굴 외에도 순수한 빛의 성으로 구성된 천국의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모하메드의 천당, 마법의 정원: 이슬람교에서 죽음은 전사의 영웅적 희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편적 죽음 속에는 전사(戦士)들의 승리에 대한 도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쟁 이데올로기에 의헤 심리적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더 이상 죽음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적과 싸우다 죽는 용맹한 전사들은 행복한 저세상으로 떠나는 자들로 이해되었습니다. 모하메드는 전투가 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와 천국 사이에는 오로지 적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군인의 희열과 불타는 열정은 반드시 나중에 모하메드의 천당이라는 마법의 정원에서 보상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하메드의 천당은 일곱 개의 문을 거쳐야 합니다. 거기에는 황홀한 규방이 나타납니다. 순결한 처녀들이 나타나, 용맹과 정의를 떨친 다음에 죽은 자들을 맞이합니다. 거기에는 사랑의 묘약과 찬란한 음식 그리고 쾌락을 안겨주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법의 정원에는 짜릿한 오르가슴의 순간이 천년으로 연장되어 있습니다.

 

선남선녀들은 서로 끌어안으며 사랑을 나눈 다음에 천사의 노랫소리를 듣고 잠을 청합니다. 풍경이 흔들리면, 아름다운 화음이 널리 퍼져나갑니다. 이렇듯 이슬람의 신앙은 영혼이 죽지 않으며 남성의 위대성을 강조합니다. (Bloch, PH: 1335). 무함마드의 제자, 일리는 스승의 시신 앞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오 예언자여, 죽은 뒤에도 당신의 페니스는 언제나 하늘로 향해 뻣뻣하게 발기해 있으소서. O Propeta, et in morte penis tuus coelum versus erectus est.” 아라비아 철학은 이러한 사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가령 아베로에스는 이러한 영혼불멸설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계몽적인 철학의 책자들은 무지막지하게도 분서갱유를 당했습니다. 요약하건대 이슬람 신앙은 전사들이 감각적인 사랑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끔찍한 살육 이후에는 영원한 사랑을 만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주었습니다.

 

23. “해방은 오로지 휴식에 있다.” 불교에 나타난 갈망의 상, 열반: 불교는 죽음 이후의 상에 처음부터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불자는 삶과 죽음이 단절되어 있다고 믿지 않으므로, 선한 행동이 죽은 뒤에 보상받게 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윤회와 관련하여 탄생과 죽음이라는 반복되는 과정 자체가 몹시 번거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관한 생각을 떨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도덕적 강령에 해당하는 보답의 인과율은 업보, 다시 말해서 “카르마Karma”의 작은 범위에 해당합니다. (Bloch, PH: 1341). 선(善)은 삶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이라는 순환의 카테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합니다. 오로지 깨달음 내지는 대오각성만이 이를 부분적으로 해결하게 합니다.

 

불교에는 우주에 관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세상은 인간의 상상으로 축조해낸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은 저세상의 구조 내지는 외적으로 드러난 형체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죽음과 삶의 고통을 떨치려면 “열반 Nirwana”에 도달하는 게 첩경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힌두교가 말하는 “깊은 잠의 상태”가 아니라, 완전성 속에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우주론(無宇宙論)에 입각해 있는 “흩날려 사라짐”, 소진(消尽), 갈증의 고갈 등으로 표현됩니다. 석가모니가 발견한 열반은 죽음도 없고, 불사(不死)도 없는 불멸의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죽음, 삶, 극락 등의 영역보다 우위에 있는 휴식의 새로움을 가리킵니다. 요약하건대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을 서술하는데, 여기에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크고 작은 행운, 안락함과 같은 갈망을 충족하려는 의향이 담겨 있습니다.

 

(21롷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