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4) 희망의 원리, 제 5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22. 09:31

(23에서 계속됩니다.) 

 

14. 문제는 재기억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Novum”이다.: 블로흐에 의하면 훌륭한 최고 상태는 최종점Ultimum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블로흐는 재기억 대신에 전선 근처에 서성거리는 새로운 무엇을 강조합니다. 희망이라는 기대 정서는 플라톤의 “재기억Anamnesis)” 이론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블로흐에 의하면 “근원”, 즉 과거에 있었던 진리를 마치 조상님처럼 숭배해 왔습니다. 블로흐는 플라톤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 헤겔을 거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근원 중심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대부분 사상가는 플라톤의 재기억 이론을 제반 철학적 인식의 토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Bloch, PH: 234f.) 이로써 미래는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희망은 마치 “신기루 Fata Morgana”와 같은 무엇이라고 합니다. 철학적 소재에 대한 과거 지향적인 경향은 헤겔 (Hegel, 1770 - 1831)에게서도 엿보입니다.

 

헤겔의 최후의 개념 속에는 그저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연결고리를 이루며 양단적(両端的)으로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한 원초적 원형은 어떤 근원적 존재를 포괄하는 반지의 형태 속에서 알파 그리고 오메가로 머물고 있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알파와 오메가에는 과정에 온존해 있는 온갖 새로움의 실체가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으로 중화되고 희석될 뿐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이 역사적 진보를 끝없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원형으로 회귀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고로 원형의 원칙은 궁극적으로 역사 발전의 의미를 제한하고 약화하며, 대신에 태초에 근거하는 신정론(神正論)을 강화하도록 작용합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결합은 결국 헤겔에 의하면 처음과 마지막, 다시 말해 태초와 미래를 연결하는 사고로서, 인간의 모든 노력을 그야말로 유한하고, 무가치하며, 헛된 것으로 규정하게 합니다. 이에 반해서 블로흐는 “새로운 무엇”을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에 들려주는 놀라운 트럼펫 신호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부자유를 떨치는 혁명적 봉기의 사건에서 맹렬하게 퍼지는 해방의 팡파르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15. 유토피아 개념의 확장: 두 번째로 블로흐는 국가 소설 뿐 아니라, 인간적 갈망의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유토피아의 개념을 확장합니다. 지금까지 유토피아 연구는 “국가 소설 Staatsroman”만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국가 소설은 “더 나은 국가”를 하나의 문학적 모델로 서술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국가 소설만이 어떤 유토피아적 의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가령 주체가 품고 있는 “의식의 지향성 Intentionaltät des Bewußtseins”으로서의 갈망. 낮꿈의 일부는 놀랍게도 사회 개혁의 의지로서 차제에 어떤 긍정적 결실을 맺게 합니다.

 

의식의 지향성으로서의 갈망은 특히 문학 작품 속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게르트 우에딩Gert Ueding은 “유토피아는 국가 소설이라는 장르로 국한될 게 아니라, 문학 자체가 유토피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Gert Ueding: Literatur ist Utopie, Frankfurt a. M. 1978.) 왜냐면 문학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갈구하거나 경고하는 어떤 가상적 사고로서의 유토피아를 주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 자체 유토피아의 공간일 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블로흐는 의식의 지향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체 갈망 내지 “낮꿈” 속에서 유토피아의 성분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16. 종말론적 메시아사상 속에 담긴 유토피아의 성분. 14세기 칼라브레제 수도원장인 조아키노 다 피오레 (Joachim de Fiore, 1130/35 - 1202)의 천년왕국설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아키노는 오리게네스 (Origenes, 185 - 254)의 성서에 대한 세 가지 문헌학적 연구방법 (자구적 읽기, 도덕적 읽기 그리고 영성적 읽기)을 역사철학의 세 가지 단계로 대치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는 조아키노에 의하면 “파국의 시대 (구약의 시대, 성부)”를 끝내고 “사랑의 시대 (예수의 시대, 성자)”를 지나쳐서 “모든 기독교인이 평등한 삶을 구가하는, 이른바 제 3의 나라를 건설하는 시대 (묵시록 이후의 시대, 성령)” 로 발전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나타난 것이 이른바 “천년왕국설 Chiliasmus”입니다. 종말의 시점은 연구자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년왕국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혁명을 애타게 갈구하는 인민들의 마음속에 엄청나게 커다란 기대감을 심어주었습니다. 20세기 초의 유럽 사람들의 혁명 운동의 열기는 궁극적으로 조아키노 다 피오레로부터 야콥 뵈메 (Jakob Böhme, 1575 - 1624)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천년왕국설 내지는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17. 요약: 유토피아 모델, 성분 그리고 디스토피아: 블로흐는 국가 소설에 나타난 유토피아 모델 그리고 주체의 의식 속에 투영된 유토피아의 성분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은 유토피아의 특성으로 정착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모델은 합리적 구도로 설계된 국가 소설이고, 유토피아의 성분은 주체의 애타는 갈망 내지는 의향을 내재하고 있는 갈망과 메시아사상 등을 가리킵니다. 전자가 절제와 합리적 구획 등에 의해서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냉정한 사고라고 한다면, 후자는 찬란한 과거를 순간적으로 의식하여, 이를 혁명적으로 실천하려는 열광적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Bloch, MA: 372). 그렇기에 국가 소설과 메시아사상 속에 제각기 도사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어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전자가 유토피아라는 달걀의 노른자, 후자는 유토피아라는 달걀의 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의 특성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18. 마르크스주의의 한류와 난류: 셋째로 블로흐는 이념의 지향성을 고려하여 기독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의향을 고려할 때 두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집니다. 그 하나는 주어진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선취하는 작업입니다. 전자는 냉정하고 치밀한 분석 작업을 요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한류, “차가운 전류 Kältestrom”이며, 후자는 찬란한 평등 사회의 삶에 대한 열광적인 선취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난류, 즉 “따뜻한 전류 Wärmestrom”라고 합니다. (Bloch, PH: 241).

 

문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 경제학의 관건으로 축소되어, 후자, 즉 마르크스주의의 난류가 무시된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상은 내용 및 방법에 있어서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향하는 의지를 고려할 때 어떤 놀라운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념은 “사랑의 공산주의”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블로흐에 의하면 사도 바울 이후로 체제 옹호적으로 변화된 기관입니다. 타르수스 출신의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으며, 교회의 전파를 위해서 “내세” 그리고 “참회”를 강조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이념인 사랑의 공산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사회적 평등의 실현하려는 마르크스의 과업과 동일합니다.

 

19. (보충 설명)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마르크스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흔히 동구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반면에, 서구에서는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에 적대적 자세를 취합니다. 블로흐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렇게 비판적으로 수용된 사회적 배경은 어떠한가? 하고 묻습니다.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기독교가 만인의 삶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해 왔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시민 사회의 권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기독교의 기능을 분쇄하지 않는 한, 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오로지 바로 이러한 종교의 부정적 기능을 비판했을 뿐, 종교에 내재하는 세계 구원의 의지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동구에는 무신론, 서구에는 기독교”라는 말 자체는 빙산 일각의 피상적 등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블로흐는 기독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독교 사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만인의 평등, 2. 억압당하는 인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저항운동, 3. 새로운 삶을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선취하는 노력의 확산.

 

(2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