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8) 희망의 원리. 제 4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4. 1. 10:45

(17에서 계속됩니다.)

 

8 햄릿, 갇힌 의지: 고뇌하는 인간은 행동하지 않는 한 죽은 영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내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의지를 품고 있지만, 모든 격정은 자신의 내면에서 반대 상으로 떠오를 뿐입니다. 남성적 욕망과 실천적 의지는 폐쇄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의 숙고 행위는 자신의 행동을 방해합니다. 햄릿은 자신의 마음속에 갇힌 수인(囚人)입니다.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햄릿 역시 블로흐에 의하면 거대한 유형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입니다. 그러나 햄릿은 너무 과도한 목표를 선취함으로써, 그것을 점화시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행동에 대한 대리 행위를 너무 많이 떠올림으로써 스스로 마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햄릿의 사고는 밤의 분위기 내지는 무(無)와 관계됩니다. 죽음과 같은 특성은 바로크 시대의 한복판에서 나타난 허무주의 내지는 가식주의와 관련되고 있습니다. 햄릿은 단도에게 말을 건넬 뿐, 단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Bloch, PH: 1213). 그러한 한 그는 방해 받은 오레스테스이며, 거부당하는 개혁자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그가 죽음과 같은 무(無)에 집착하는 한 어떠한 거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요약하건대 햄릿은 거대한 목표를 품었지만, 어떠한 무엇도 실천하지 못한 몽상가에 불과했습니다.

 

9. 프로스페로, 심층부로 향하는 유머: 셰익스피어는 후기 작품 「폭풍The Tempest」에서 인간의 원초적 유머를 구명하려고 했습니다. “프로스페로”는 어원상 “호의를 받는 자” 내지는 “번영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갈구하는 바를 쟁취하는 존재로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력적인 환상은 작품 속에서 실제 현실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프로스페로와 그의 딸, 미란다는 고향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청산하고 어디론가 도주합니다. 사악한 사람들이 정치를 장악하고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미덕이 자리하는 멀리 떨어진 섬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토머스 모어와는 달리 섬의 정치 경제적 구도를 세밀하게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만 섬에서는 파멸하는 인간의 문명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첨예하게 대립할 뿐입니다. 프로스페로는 자유로운 천혜의 섬을 칭송하지만, 그의 동생은 권력을 찬탈하려는 마음을 품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언젠가는 게으름 피우는 천민, 청녀 그리고 거지들이 속출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낙관적 태도를 견지합니다. “선과 아름다움의 완성 Kalokagathie”야 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Bloch, PH: 1213). 가령 미란다와 페르난도의 결혼은 이에 대한 좋은 범례라고 합니다. 작품은 주인공, 프로스페로가 체험하는 아리엘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공간이지만, 아름다움 속에서 휴식하는 가상의 나라입니다. 이렇듯 주인공이 들어서는 입구와 출구에는 아무런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 기쁨과 유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0. 돈키호테, 망상과 분열에 사로잡힌 영웅: 돈키호테는 블로흐에 의하면 세상과는 전혀 낯선, 시대에 뒤떨어진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이었습니다. 돈키호테는 책을 탐독하다가, 현실의 감각을 잃게 됩니다. 현재 자신은 중세의 시대에 활약하는 편력 기사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은 고결하고 공명정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시대착오적으로 날뛰는 광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돈키호테는 기사들 가운데 아마디스의 슬픈 고독을 추종하기로 작심합니다. 그는 창을 들고 있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산을 꽂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와 현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정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거세된 양떼는 군인들로 보이고, 풍차의 날개는 험상궂은 거인으로 보이며, 이발사의 세숫대야는 맘브린의 투구로 비칩니다. 목로주점의 하녀는 돈키호테의 눈에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온 아리따운 공주로 비칠 뿐입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착시 현상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돈키호테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을 충직하게 수행하는 시대착오적 영웅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고결한 영웅과 그를 비웃는 일반 대중들 사이의 위화감은 현란한 만화경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박홍규: 돈키호테처럼 미쳐?, 돋을새김, 2007, 43쪽). 가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실제 현실을 바르게 인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망상을 첨가하여 실제 현실을 부정하곤 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산초 판사가 나중에 꿈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비해, 돈키호테는 죽음 직전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삶 자체가 망령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11. 돈키호테의 연인 둘시네아: 둘시네아는 돈키호테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미는 돈키호테의 마음속에는 완전무결한 처녀로 각인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영웅은 그를 직접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미를 만나는 것은 간절한 꿈이지만, 돈키호테는 행여나 만남을 통해서 사랑의 상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약혼녀, 레기네 올젠에게 이별을 선언한 쇠렌 키르케고르의 잘못된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키르케고르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 그미와 이별을 선택했는데, 결국 남은 것은 연구 서적과 후회의 편지들이었습니다. (Søren Kierkegaard: Tagebuch des Verführers. Manesse Verlag, Zürich 2013, S. 79.)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기사들의 연애 봉사에는 성적 욕망은 거의 실천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은 기사들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결한 임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둘시네아는 토보소에 거주하는 못생긴 여성입니다. 그렇지만 돈키호테는 그미가 공장의 집에서 찬란한 등불 아래에서 면사포를 쓴 채 자태를 뽐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돈키호테의 희망의 세계는 자신에게는 실제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둘시네아는 “발견될 수 없는 여인la femme introuvable”으로 이해됩니다. 그미는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 별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렇듯 돈키호테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운명은 놀라운 망상과 정신착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12. 돈키호테, 정말로 누가 바보이며, 어리석은 영웅인가?: 작품 『돈키호테』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관심사는 주인공과 산초 판사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돈키호테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고결하고도 숭고한 목표를 견지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를 조롱하고 경멸합니다. 문제는 돈키호테가 자신의 망상을 무지막지하게 실천하려는 데 있습니다. (Bloch, PH: 1233).

 

그런데 그의 망상이 세계를 구원하려는 거룩한 목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어떨까요? 사실 돈키호테의 외양 그리고 어설픈 행동은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내적인 목표가 선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려는 웅대한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떨까? 하고 블로흐는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하고 낄낄거리고 웃던 로마 병정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큰 뜻을 추호도 이해하지 못하고 경박한 농담을 주고받을 뿐입니다. 이들의 태도는 몇 푼의 돈 때문에 체 게바라를 밀고하여 정글에서 무참하게 사살당하게 만든 볼리비아 농부들의 배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19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