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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1) 크리스토프 하인의 '점령'

필자 (匹子) 2023. 12. 2. 10:17

(1) 보복과 과거 극복의 문제: 친애하는 H, 오늘은 크리스토프 하인 Christoph Hein이 환갑 나이에 발표한 전환기 이후의 소설, 『점령 Landnahme』(2004)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90년대 이후로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두 가지 치명적인 증상을 예리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독일인들의 “타자에 대한 증오 Xenophobie”의 신드롬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후 동독 출신 사람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성향 내지는 과거사에 대한 망각의 신드롬을 가리킵니다.

 

(2) 이전의 작품, 「낯선 연인」:「낯선 연인」은 주어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른바 성격갑옷을 덮어쓴 인간형을 추적합니다. 가령 작품의 주인공인 여의사, 클라우디아는 애인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도 어떠한 슬픔의 흔적은커녕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그의 애인, 헨리는 사소한 다툼 끝에 싸우다가 일순간에 급사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의 심리는 한마디로 성격갑옷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마치 독일의 전설에 등장하는 지크프리트가 용의 피로 목욕한 뒤에 어느 누구로부터 상처 입지 않게 되었듯이, 주인공 또한 냉혹한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외부적 자극에 대해서도 자신의 오욕칠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게 됩니다.

 

클라우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가죽을 덮어쓴 짐승” 한 마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충격적 사건이 그미의 심리에 치명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 카타리나와의 쓰라린 결별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도 감성적이라고 치부되는 우정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깊이 작용하는가? 하는 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 자신이 스스로 성격갑옷을 두르고 있다는 점을 모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3) 외국인 철면피: 하인의 새로운 작품 『점령』의 주인공 역시 성격갑옷을 덮어쓴 인간형입니다. 말하자면 철면피이지요. 베른하르트 하버라는 남자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데, 1944년생으로서 작가와 나이가 같습니다. 그는 과묵하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마치 집요한 탱크나 다름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는데, 1950년에 부모를 따라 구동독의 굴덴베르크로 이주해 옵니다. (굴덴베르크는 하인의 소설 『호른의 최후 Horns Ende』에도 나타나는 작센 지역의 가상적인 소도시입니다.)

 

베른하르트의 아버지는 목수로 일하다가, 어떤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브레슬라우 지역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의 작센 지방의 소도시로 이주해 와서, 자그마한 목공소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책상이라든가 관 (棺) 등을 만들어 팔아서,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굴덴베르크의 토박이들은 낯선 이방인인 주인공의 아버지를 배척하고 경원시합니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아버지를 동구에서 이주해온 뜨내기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음으로 양으로 방해공작을 펴나갑니다. 이러한 배타적 태도는 동네 아이들이 처음에 주인공을 “폴라켄 (폴란드 놈)”이라고 놀려대는 데에서도 발견됩니다.

 

(5) 목공소의 화재사건: 어느 날 아버지의 목공소에 화재가 발생합니다. 추측컨대 마을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몰래 불을 지른 게 틀림없었습니다. 화염에 휩싸인 목공소가 진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폐허가 된 목공소 내부에서 개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개는 “틴츠”라는 이름을 지닌, 베른하르트 하버 가족의 애견이었습니다. 목에 전깃줄이 칭칭 감겨 있는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 고의로 방화하기 전에 컹컹 짖어대는 개를 잔혹하게 교살했음이 분명했습니다.

 

주인공은 틴츠의 사망으로 엄청난 슬픔과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는 “틴츠를 죽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어 죽이고 말 거야.”하고 말하면서 친구들을 찾아가서 한 명씩 주먹으로 협박합니다. 베른하르트는 주먹질 잘하는, 힘센 아이였습니다. 화재 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의 뇌리에는 범인으로 지목되는 용의자가 스쳐지나갑니다. 그자는 굴덴베르크 공동체에 속한 토박이 속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아버지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의혹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어렴풋하게 말합니다. “범인을 체포하시고 싶으시면 혐의자의 이름을 ‘굴덴베르크’라고 기록하시지요.” 이 말 속에는 굴덴베르크 시민들의 배타적 소시민근성이 화재를 불러일으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6) 아버지의 죽음: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인공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새롭게 증축한 목공소에서 아버지는 어느 날 처마의 전깃줄에 감긴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자살이라고 추정했으나, 정작 가족들만큼은 자살을 완강하게 부인했습니다.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성격상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경찰은 아버지의 몸에 타살의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은 약 30여년이 지난 시점인 1984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베른하르트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며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마을 남자들이 술에 취해서 장난삼아 벌린 폭력에 의해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범인은 베른하르트의 아버지를 괴롭히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는데, 나중에 시신을 전깃줄에 매달아, 마치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살한 것처럼 꾸몄던 것입니다.

 

(7) 은폐되는 과거의 범행: 주인공이 이러한 청천벽력의 사실을 알아내었을 때, 그의 나이는 갓 마흔을 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지금까지 소도시에서 경제적 이윤을 얻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투기꾼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당시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굴덴베르크 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업가로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베른하르트 하버는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이란 말인가? 그런데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범인을 밝혀 법정에 세우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만약 그런 식으로 법대로 행동한다면, 자신은 분명히 몇몇 친구들과 엄청난 마찰을 빚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사업 파트너 내지 친구들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 분명히 범인일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굴덴베르크 사람들과의 인맥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모든 것을 덮기로 결심합니다.

 

(8) 부자가 된 주인공, 과거를 은폐하다: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그의 사업은 국가의 여러 제재 내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놀라운 사업적 수완은 마치 순풍에 돛단 듯 놀라운 결실을 맺습니다. 자신의 공장은 풀가동되자, 대대적인 수익금이 자신의 은행 계좌로 들어옵니다. 당시 서독 경제인들은 통독 이후에 동쪽 독일 지역에 서서히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주인공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입니다.

 

90년대에 이르러 베른하르트 하버는 굴덴부르크의 명망 높은 유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번창하는 공장, 언제나 밝게 미소 짓는 아내와 두 명의 자식 그리고 화려하고 값비싼 빌라가 있습니다. 소설 『점령』의 주인공, 베른하르트 하버는 그저 시청의 난간에서 우두커니 서서,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을 관망할 뿐입니다. 통일된 독일의 모습은 작가의 눈에는 마치 희희낙락거리는 선남선녀들의 카니발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은 채 아니, 비참한 과거의 삶을 모조리 뇌리에서 씻어버린 채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제 속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지나간 죄악과 고통이 무작정 은폐되어 있습니다.

 

(9) 토마스 니콜라스: 친애하는 H, 위의 사항은 작품의 주된 줄거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기한 이야기는 작품에서 일직선적 줄거리에 의해서 서술되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다섯 명의 화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서술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다섯 명의 화자는 베른하르트 하버 그리고 그의 조상들의 흐릿한 삶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얼기설기 짜 맞추고 있습니다. 소설의 첫 번째 화자는 토마스 니콜라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약국 주인의 아들입니다. 그는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주인공의 학교생활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묘사는 주인공의 가족이 굴덴베르크에 정착하던 시점부터 주인공의 학창시절의 이모저모를 전해줍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