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1) 마리온 데무츠: 소설의 두 번째 화자는 마리온 데무츠라는 여성입니다. 마리온은 주인공의]이 맨 처음에 사귀던 여자 친구입니다. 그미는 주인공의 정치적 배경이 어떠하며, 어떠한 정치 단체에 가담했는지를 알려줍니다. 독자들은 가령 다음의 사실을 마리온을 통해서 접하게 됩니다. 즉 주인공의 사회 참여는 결국 굴덴베르크 공동체에 대한 주인공의 묘한 심리적 보복의 감정에서 비롯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마리온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지니지 못한 채 언제나 누구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타인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그미는 “베른하르트가 왕년에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라는 소문을 액면 그대로 믿고, 주인공과 헤어질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마리온 데무츠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피상적 사항에만 집착하는 그미의 발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거짓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2) 페터 콜러: 소설의 세 번째 화자는 페터 콜러라는 남자입니다. 그는 주인공 베른하르트의 학교 친구입니다. 소설의 거대한 부분이 페터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페터는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한 사업적 수완 그리고 열정적 끈기를 지니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페터는 인정 많고 착한 남자이지만, 오로지 부자가 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주인공, 베른하르트의 사업에 이따금 관여하는데, 판단력이 흐려서인지는 몰라도 주인공처럼 커다란 이익을 창출해내지는 못합니다.
어느 날 페터는 동독을 탈출하려는 사람을 도와주다가 발각되어서, 5년 5개월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감옥에서 허송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페터 콜러는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 사내지만, 때때로 경박할 정도로 순진하게 행동합니다. 사회적 성공을 갈구하지만, 사실적 정황을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과도한 의지에 따라 천방지축 행동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안타깝게도 실패를 거듭하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13) 카타리나 홀렌바흐: 소설의 네 번째 화자는 카타리나 홀렌바흐라는 여성입니다. 스포라 출신의 카타리나는 열정적이며, 놀라운 에너지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카타리나는 자신의 성욕을 과도하게 드러내며, 이를 주인공에게서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그미는 리케의 여동생인데, 주인공이 리케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주인공의 처제가 됩니다. 카타리나는 주인공이 어떻게 리케와 사귀게 되었는가를 차근차근 서술합니다.
카타리나 역시 오래 전부터 강인한 마초와 같은 베른하르트에게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여러 번 유혹하여 하룻밤의 정사를 획책하지만, 그미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카타리나가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강한 협박으로 주인공을 유혹하려고 애쓰는 대목은 독자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카타리나 홀렌바흐는 스스로 선한 체하면서, 허영심과 약간의 협박 기질을 지닌 변덕스러운 여자입니다.
(14) 지구르트 키체로: 소설의 다섯 번째 화자는 지구르트 키체로라는 남자입니다. 일종의 사업 파트너라고 할까요? 지구르트는 베른하르트의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두 사람 관계가 가깝지는 않습니다. 그는 톱과 같은 공구의 생산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데, 작품에서 페터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어떻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가? 하는 과정을 알려줍니다. 결국 지구르트의 재산은 주인공 베른하르트에게 귀속되고 말지요.
그런데 주인공이 소도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바로 지구르트입니다. 예컨대 그는 굴덴베르크 공동체에 속하는 볼링 클럽으로 주인공을 데리고 가서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지구르트 키체로는 행동가 내지 전략가로서 주인공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지만, 정작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는 쓰라린 패배를 맛봅니다.
(17)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근성: 이미 언급했듯이 베른하르트 하버는 학창시절에 그리고 소도시의 사회에서 쉽사리 타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부모가 타향 사람, 그것도 동구에서 쫓겨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베른하르트의 아들은 통일된 독일의 굴덴베르크에서 외국인들을 혐오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과거 주위 사람들로부터 피해당하던 이방인의 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들에게 해악을 저지르는 가해자가 된 것입니다. 아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고 주인공에게 묻습니다. 이때 베른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독일의 카니발 외에 우리가 탐닉해야 할 것은 개뿔도 없어.”
주인공의 전언은 한마디로 “과거를 묻지 마세요.”로 요약됩니다. 오래 전에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공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네 할아버지는 동구에서 쫓겨난 사람이었어.” 그런데도 주인공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대답을 망각하고, 아들의 질문에 대해 그저 모르쇠가 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요? 수치스러운 과거를 모조리 뇌리에서 삭제하려는 주인공의 태도는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8) 의로움인가 이로움인가?: 주인공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지칠 줄 모르고 끈덕지게 일하다가 사회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합니다. 도시의 유지가 된 주인공은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인 동독에서 강제노동, 공화국 탈출 등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왔지만, 힘든 과거의 삶은 편안한 마음속에서 사장되고 해체되어버립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을 밝혀내고, 범인에게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주인공은 모든 과거 행적을 덮어두려고 결심합니다. 밝혀보았자, 자신이 친하게 지내는 주위의 유지들과의 인간관계만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비굴하게 살아온, 도망 다니면서 살아온 조상들의 행적일 것입니다.
심리적 껄끄러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장사꾼의 순간적 욕심 때문일까요? 주인공은 아버지의 범인을 찾아서 그를 벌하는 법적 절차가 자신에게 조금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베른하르트 하버는 모든 것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비록 아버지는 살해당했지만, 계급적으로 핍박당하고 심리적으로 경멸당하면서 살던 과거 삶은 그야말로 과거의 삶일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즐거운 축제, 그것뿐입니다.
(19)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는 황금: 돈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삶의 가치를 모조리 저버릴 수밖에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하인이 작품에서 가상적으로 설정한 도시를 굴덴베르크라고 명명한 것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굴덴베르크는 자구적으로 번역하면 “돈으로 이루어진 성 城 Gulden + Burg”을 가리킵니다. “굴덴”이 과거의 독일 화폐로 활용된 바 있으며, “베르크”는 자구적으로는 “산”을 지칭하지만, 어원상으로는 “성 城”과 관련됩니다.
하인의 소설의 본질적 테마는 바로 이러한 질문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돈 때문에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내버리는 경우가 자주 매스컴에 보도됩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하인은 가상적인 도시를 설정함으로써, 특정 독일인들의 심기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만능주의의 사고가 얼마나 끔찍한 죄악을 재생산해내는가? 하는 문제를 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찬란한 풍경은 우울과 함께 썩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끔찍한 죄악의 꽃은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소도시의 온실 속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H, 유럽의 매스컴에서 간간이 접하게 되는 네오나치의 범죄 내지 학살사건들은 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발적으로 속출하는 사고가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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