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

필자 (匹子) 2023. 8. 10. 11:20

친애하는 Y, 지금까지 당신에게 비극적인 작품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은 기분 전환을 위하여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BC. 445 - 385)의 희극, “개구리들 (βατράχοι)”에 관해 이야기를 언급할까 합니다. 이 작품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숙한 시절에 씌어진 명작인데, 고대에서 그리고 중세 비잔틴 문화권에서 가장 사랑받던 작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구리”는 기원전 405년에 필로니데스의 연출로 맨 처음 공연된 바 있습니다. 필로니데스는 이 작품 외에도 “말벌 (σφήκες)” 그리고 두 편의 소실된 작품들을 공연한 연출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 이 작품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디오니소스 축제일에 두 번이나 공연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고대 그리스 연극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디카이아르크 (Dikaiarch)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연의 성공은 “파라바제 (parabase)”, 즉 “합창 지휘자가 작가를 대신에 청중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제 675행에서 735행에 이르는 “파라바제”는 극작품의 핵심적 대목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작품에 전개된 두 개의 이야기 (674행 그리고 796행)에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형식적 측면 뿐 아니라, 주제를 고려하여 “파라바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가령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극작가의 기본적 입장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극작가는 첫 번째 단락에서 극적 사건의 동인에 관해서, 두 번째 단락에서는 마지막 규범에 관해서 직접 발언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규범이란 도시의 안녕을 위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이 작품을 집필했을 때는 기원전 406년이었는데, 이 시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아르기누스 사람들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지만, 스파르타와의 권력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패배당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도시는 내적으로 안정, 명상을 필요로 했으며, 노여움을 부추기는 선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극작가의 “파라바제”는 성스러운 신비주의자의 입을 빌리고 있습니다. 가령 “아마 합창은 국가에 이로운 무엇을 조언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적당한 것이야. 우리는 무엇보다  즉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공포의 시대가 사라질 테니.” 말하자면 극작가는 사면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직접 피력함으로써, 도시 아테네에 정치적으로 조언한 셈입니다.

 

친애하는 Y, 물론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을 썼을 뿐, 정치 논문을 작성하지는 않았습니다. 극작가가 선택한 매개체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소재입니다. 지옥의 여행과 비극에 대한 패러디 등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극작가 비판과 잘 섞여 있습니다.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는 지하의 세계에서 “어느 훌륭한 작가”를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가 죽은 뒤에 (기원전 406년) 비극의 무대는 황폐해 있기 때문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문장을 인용하며, “가장 훌륭한 자들은 죽었고, 저기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도다.”하고 말합니다.

 

이제 작품의 내용을 거론해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장에서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하인, 크산티아스와 함께 지하 세계로 내려갑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매우 혼란스럽고도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과 노예는 서로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나눕니다. 디오니소스는 헤라클레스처럼 분장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하 세계에 대해 몹시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신이라고 하더라도 한번도 그곳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하의 개구리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합창은 개구리 울음 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디오니소스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커다란 굉음으로 이에 화답합니다. 흉측한 어느 괴물이 출현했을 때, 신은 무대에서 도망치며, (디오니소스 사제가 앉아 있는) 앞무대 귀빈석의 배후에 숨기도 합니다. 가끔 주인과 노예는 서로 옷을 바꾸어 입기도 합니다. 이로써 익살스러운 민중극의 요소는 백일하에 드러나지요.

 

두 번째 장에서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는 서로 경합을 벌립니다. 두 사람은 최고로 훌륭한 작가로서 멋진 왕관을 차지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때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는 그들의 비극 작품에서 인용된 것인데, 의미가 기막히게 와전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듭니다. 아이스킬로스의 목소리는 어둡고도 거창한 반면에, 에우리피데스의 목소리는 궤변론자의 음성처럼 가식적이고도 우아합니다. 작품 내에 토론의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아리스토파네스는 주인공의 지하 여행을 그럴듯하게 만듭니다. 디오니소스는 지하 세계에서 두 명의 극작가가 다투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때 그는 재판관으로서 둘 중 한 사람을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선정해야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심정적으로는 젊은 극작가에게 이끌리지만, 이성적으로는 나이 많은 작가가 더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천칭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 천칭은 언어의 무게를 다는 천칭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두 작가가 사용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언어 의미의 무게를 달아보기도 하지만, 천칭은 분명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Y, 결국 신은 누구를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선택할까요?  아이스킬로스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아이스킬로스를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인정하고, 그를 지상의 세계로 데리고 옵니다. 아이스킬로스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었습니다. 과연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도시의 안녕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될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 기준이었지요.

 

작품 전체를 관망할 때, 작품 구성의 기이한 요소가 발견됩니다. 두 개의 서막 부분, 제 1장에서 이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 제 2장에서 이어지는 재판 과정의 상황 등은 “파라바제”로 인해 구분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으로서 우리는 극작품의 “부드러운 유머”를 들 수 있습니다. 작품의 주제는 도시의 안녕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농담, 유머 우스꽝스러운 말장난 등은 기이하게도 지엽적인 특징처럼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제 1장에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장면들, 제 2장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장이라든가, 신비적 합창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막간 소극 등은 작품의 주제를 위해서 구성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신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어째서 아리스토파네스는 두 사람의 극작가를 대비시켰으며, 관객에게 친숙한 소포클레스를 여기서 제외시켰는가? 하는 게 바로 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다른 각도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첫째로 소포클레스는 당시의 시기에 사망했고, 희극의 구상과 계획 등이 발전된 무렵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소포클레스는 희극의 차원에 있어서 다른 작가와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도 진지하고 근엄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적 영리함, 교활함 그리고 우스꽝스러움 등을 조금씩 작품에 담았습니다. 따라서 극작가는 고대적이며 낙관적 분위기에 침잠해 있는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를 대비시키는 게 더 적당했던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작품 내에서 소포클레스는 오로지 찬양받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67행, 786행 이하, 1515행 이하 참고하라.)

 

오늘날 시각에서 본다면 두 가지 의문점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관객이 과연 (특히 제 2장에서 나타나는) 두 극작가의 패러디 그리고 인용 문장을 어느 정도로 이해했을까? 하는 게 첫 번째 의문점입니다. 작품이 제대로 이해되려면 사람들은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에 대해 친숙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패러디를 어느 정도 납득할 테니까요. 나아가 당시의 관객이 무대에 등장한 디오니소스 신의 모습을 대하며, 혹시 신에 대한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두 번째 의문점입니다. 하기야 두 극작가들이 제우스를 경건하게 숭상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사항은 하나의 기우 (杞憂)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