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강인한 아이만 교육받을 수 있다. 모든 부족들은 제각기 거대한 새 한 마리를 숭상합니다. 새는 부족을 대표하는 성스러운 동물로서 이해되는데, 어디까지나 문학적으로 상상해낸 전설의 날짐승이라고 생각하면 족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새가 어떤 놀라운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새는 청소년의 담력을 키우는 데 활용됩니다. 가령 사내아이들이 여섯 살 혹은 일곱 살이 되면, 새는 해당 아이를 등에 태우고 하늘 높이 비행합니다. 만약 아이가 창공에서 현기증을 느끼거나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새는 그 아이를 낯선 곳에 버립니다. 아이가 부족으로 돌아올지 도중에서 목숨을 잃을지 하는 문제는 아이의 몫이라고 합니다. 태양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특히 사내아이들을 강건하게 키우려고 하였습니다.
8. 노예 내지 사유 재산의 철폐, 만인의 노동: 이곳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며, 노예라고는 한 명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묘사한 모든 종류의 세습적 계급이나 계급적 이상은 여기서 추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 국가에서 만인이 무조건 절대적 평등을 누리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는 평등하게 살아가지만, 나이 차이에 따라 자신의 지위 내지 품계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위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동양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그러하듯이, 노인들이 그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을 뿐입니다.
그 대신에 태양 섬에서는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똑같이 의무적으로 조금씩 노동해야 합니다. 만인의 노동은 고대에서나 그 후의 봉건 사회에서나 언제나 그치지 않고 출현했던 요구사항이었습니다. 집이나 왕궁 그리고 가정에서조차도 분화된 경제 형태가 전혀 없다는 특성이야말로, 이암불로스의 작품에서 완성된 이상적 공동 사회의 상입니다. (임성철: 153). 따라서 이암불로스의 「태양 국가」는 한마디로 고대 사회가 낳은 가장 급진적이자 마지막의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9. 축제의 삶과 신앙생활: 축제는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듯이, 노동의 의무를 더욱 고취시키고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열대라는 자연 조건에 의해 노동의 양이 줄어들었으므로,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은 채 교대로 일하며, 에피쿠로스의 이상인 행복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Jones: 164f). 적도에 있는 일곱 개의 섬들은 어두운 삶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땅이며, 포도주의 나라인 셈입니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모순을 모조리 용해시키는 디오니소스의 태양이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태양은 정의로운 자들과 정의롭지 않은 자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빛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태양은 마치 황금의 시대에 살았던, 자선을 베푸는 왕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원주민들은 태양 외에도 천체의 별들을 신들로 숭상합니다. 장례 절차 역시 고대인들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누군가 사망하면, 썰물의 시기에 시신을 해변의 땅 속에 깊이 묻습니다. 그 다음에 그 위에 모래를 덮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밀물이 들이닥치더라도 시신이 바닷물 위로 솟아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태양 섬은 계층 차이를 용인하지 않고,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향락을 최대치로 달성하면서 살아가는 이상적 공간이었습니다. (임성철: 154)
10. 요약: 에우헤메로스의 『성스러운 비문』과 이암블로스의 「태양 국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유토피아의 역사에 관한 많은 사항을 알려주는 문헌입니다. 고대 그리스 그리고 헬레니즘의 시대에서 오로지 신화 내지 신들의 삶은 하나의 유일한 절대적 진리를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에우헤메로스의 경우 그리스의 신들은 태고 시대의 인간적 유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신들의 행위에 대해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태고 시대의 인간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오이에메로스의 이야기는 신화비판의 자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신화의 구속성에서 벗어나서 인간적 능동성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밖에 「태양 국가」는 이후의 문학 유토피아를 위한 고전적 범례와 같습니다. 이 작품은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는 어떤 바람직한 국가에 관한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암불로스의 작품은 마치 루키아노스의 거짓 이야기처럼 막연한 동화 내지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로 동시대인에게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러 푸아니 그리고 캄파넬라 등은 이암불로스의 문헌이 바람직한 국가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인지하고, 이러한 특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의 문학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어서 먼 훗날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1. 고대의 유토피아의 특징들 (1): 지금까지 우리는 에우헤메로스와 이암불로스의 문헌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고대의 유형적인 유토피아 상이 엿보입니다. 물론 두 작품 외에도 찬란한 이상 국가는 고대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묘사되고 있습니다. 두 문헌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대의 유토피아의 특성을 요약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고대의 유토피아에 묘사되는 사람들은 동일한 신체조건을 지니고 있으며, 유연하고 민첩하게 행동합니다. 이는 질병에 대한 고대인들의 태도와 관련됩니다. 고대인들은 질병에 걸리면, 빠르든 이르든 간에 사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대 사람들은 병자를 국가에 순해를 입히는 그룹으로 구분하곤 하였습니다. (Swoboda: 35).
12. 고대의 유토피아의 특징들 (2): 둘째로 고대의 작품에서는 아름답고 완전한 육체가 자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고대의 성의 금기 사항이 기독교가 영향을 끼쳤던 중세나 근대에 비해서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대인들이 내세의 삶이 아니라, 현세의 삶을 중시했기 때문에 육체성을 강조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대인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내세를 기리는 중세 사람들의 태도와는 달리, 현재의 아름다룬 삶 그리고 현세의 행복과 향락 등을 중시하였습니다. 셋째로 고대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150살까지 생명을 유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인들의 수명이 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대인들은 유독 육체적 질병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질병은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여신, 모이라가 펼치는 사망의 휘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랜 삶과 영생에 대한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150년 이상의 삶을 갈망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더 이상 육체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을 경우, 마치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 그러했듯이 곡기를 끊다가 세상을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건강과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갈망과 결부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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