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1) 라이히 금지된 유희와 허용된 굴레

필자 (匹子) 2023. 5. 31. 08:27

 

“여기서 빌헬름 라이히는 하나의 범례일 뿐이다.” (필자)

“나의 딸이여, 인간의 삶에서 사랑은 가장 귀중하고도 값진 일이다. 남녀의 사랑이 그렇게 고귀할진대 어찌 처녀성만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수단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게 아니라면, 몇 번이고 구애받지 말고 몸과 마음을 열어젖혀라. 다만 네가 사랑하는 남자는 돈과 권력을 무기로 삼는 소인배가 아니어야 하느니라.” (천승세: 딸에게 주는 글)

 

 

1. 순교자인가, 패륜아인가: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라이히의 삶의 행적 내지 생애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성도덕의 문제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라이히의 삶과 학문을 통해서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의 삶이 근본적으로 가장 정치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성을 부인하는 근엄한 상아탑의 풍토에 의해 희생당한 순교자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패륜의 성 연구가인가요? 아마도 라이히만큼 모든 사회 계층 사람들로부터 비난당하거나, 조소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철학의 영역에서 철저히 조소당했던 인물로서 바루흐 스피노자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은 다만 그의 신관 (神観)에 제한되었고, 스피노자를 비난했던 사람들 역시 당시에 기존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려는 스콜라 학자와 같은 지식인들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스피노자는 평생 안경을 만들면서, 조용히 생업을 이어나가다가 생존 당시에 단 한권의 저서만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나머지 문헌들은 사후에 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라이히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모조리 라이히의 오르가슴 이론을 비난하며, 그것이 사회의 미풍양속 내지는 도덕을 해친다고 매도하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전에는 피를 흘리며 서로 싸우던 관제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들도 유독 빌헬름 라이히의 이론이 거론되면 서로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그를 정면으로 공격하곤 하였습니다.

 

2. 프로이트의 학문적 질투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왕년에 니체 그리고 릴케와 열렬히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 루 살로메에게 애호의 감정을 표명할 때 자신의 옛 제자, 라이히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여기 있는 라이히 박사는 극렬하고도 열정적인 젊은 목마 (木馬)의 기수로서 생식기의 오르가슴에서 모든 노이로제의 처방을 찾으려고 합니다.” (Freud/Andreas-Salomé: 191). 프로이트의 이러한 말 속에는 젊은 연구가의 이론에 대한 조롱과 신랄한 비판 말고도 학문적 경쟁심이 은밀히 담겨 있었습니다. 신화 속의 인물,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제자, 탈로스Τάλως의 천재성에 경탄하고 시기한 나머지, 아크로폴리스에서 그를 밀어서 낙사하게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탈로스는 페르딕스로 명명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처럼 잔악한 짓을 직접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내심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제자를 정신분석학의 이단아로 매도하고 싶었던 게 분명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르가슴의 기능Funktion des Orgasmus』(1927)에 기술된 라이히의 근본적 입장은 그만큼 주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3. 적과 동지들의 틈바구니 그리고 억압 가설: 물론 라이히의 이론이 만인에 의해서 거부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트 좌파에 속하는 허버드 마르쿠제H. Marcuse의 에로스 이론, 게자 로하임G. Roheim의 인류학의 관심사뿐 아니라, 프로이트 우파에 속하는 보수주의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 Fromm의 건강한 삶에 관한 친절한 조언, 알렉산더 닐A. S. Neill의 실험 교육, 질 들뢰즈G.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 Guattari의 정신분석학 비판, 노만 메일러N. Mailer와 솔 벨로우S. Bellow의 소설 등 제법 많은 영향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라이히 주위에는 다수의 적 그리고 소수의 동지들이 즐비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라이히를 중립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라이히에 의하면 오르가슴이 심리적 건강의 토대이며,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심리적 병을 불러일으키는 토대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억압 가설입니다. 라이히의 억압 가설은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전문용어 “성 장치 (Sex-dispositif)”와 근본적 맥락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전체주의 국가의 지식과 권력이 강제적 원칙이라는 규율을 창안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결국 개개인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광기, 범죄, 변태적인 성 그리고 심리적 질병 등이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고 푸코는 주장하였습니다. (Foucault: 98).

 

놀라운 것은 18세기 19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이러한 사회적 터부의 대상들이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동성연애가 용인된 반면에, 어떤 시대에는 철저히 매도된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국가와 사회의 체계가 이성이라는 절대적 진리의 틀에 의해서 구성된 게 아니라, 상대적 인식의 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직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히는 이러한 사회 심리학적 시각보다는 정신 병리학자 내지 의사로서 성에 대한 억압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억압 가설은 광의적 의미에서 푸코의 사고와 결코 어긋나 있지는 않습니다.

 

4.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1): 빌헬름 라이히는 1897년, 당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속했던 부코비나에서 어느 유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마이런 샤라프M. Sharaf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겪었습니다. 라이히는 어릴 때 근엄한 아버지를 몹시 증오하였으며, 항상 모욕당하는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고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어머니는 어느 날 라이히를 가르치는 젊은 가정교사와 사랑을 나눕니다. “어머니가 선생님의 방에서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나왔을 때, 그미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혼란스러운 눈빛을 띄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Sharaf: 63f).

 

열두 살 된 소년은 언제나 가정교사의 방 앞에서 귀를 기울였으며,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식사시간에 라이히가 아버지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을 때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정교사는 라이히 가(家)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어머니는 수치심과 자괴심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만 음독 자살해버립니다. 라이히의 아버지 역시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다 몇 년 후 다른 병으로 사망합니다. 어머니의 자살은 어린 라이히에게 커다란 죄의식의 상흔을 남겼습니다. “발설하지 않았더라면...”, “이리저리 얽혀 있는 애정관계가 인간 동물의 삶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물음은 어린 라이히의 마음속에서 삶의 핵심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5.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2):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라이히는 남동생의 재정적 도움으로 빈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Reich 1992: 93). 이때 그는 프로이트를 만나게 되어, 정신분석학에 심취합니다. 1925년에 집필한 논문 「충동적 성격Der triebhafte Charakter」으로 라이히는 프로이트에게서 학문적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박사학위 취득 후 1920년대에 라이히는 정신과 의사로서 개업하였으며, 이때부터 노동자 계급에 동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가난을 그야말로 학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던 터였습니다. 말하자면 라이히는 정신분석학만으로는 사회 심리적인 제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고뇌는 그로 하여금 빈에서 “성 위생 상담소”를 개업하게 합니다. 바로 이 시기부터 라이히는 탁월하고 박력 넘치는 선동가로서 노동자들에게 대중 심리학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독특한 오르가슴 이론을 발전시키고 수많은 핵심적 논문과 저서를 집필 발표한 시기는 바로 이때였습니다.

 

6. 프로이트와의 결별: 당시에 색안경을 끼고 라이히의 이론을 바라본 사람은 다름 아니라 왕년의 은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사회주의 그리고 섹스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옛 제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초기의 리비도 이론을 저버리고, 오로지 죽음 충동과 승화의 이론에 경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과 관련된 자신의 리비도 이론이 후기 시민사회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유럽의 시민 사회의 남자들은 인간의 모든 의향과 충동이 오로지 성적 욕망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어느 “넥타이 유대인”의 정신분석학의 학설을 추호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자신의 초기 이론을 저버리고, 승화 이론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그는 「문화 속의 불안Das Unbehagen in der Kultur」(1930)에서 성충동을 더 이상 개진하지 않고, “인간이 행복하게 산다는 가설은 천지창조의 프로그램 속에 담겨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했을 뿐입니다. (Trilling 69). 실제 삶에 있어서도 프로이트는 가급적이면 절제를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강의를 들으려고 멀리서 빈까지 찾아온 루 살로메를 연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에, 프로이트는 그미에게 생활비를 부쳐주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웠습니다. 그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어쩌면 왕년에 릴케와 니체의 애인이었던 루 살로메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7.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 라이히는 1930년대 초에 베를린에 있는 독일 공산당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성 정책을 위한 독일 제국 동맹”에서 최소한 2만 명의 동지들을 규합합니다. 이때 그는 소련에서의 혁명 이후,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살아온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구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람직한 인간 삶은 경제적 풍요로움 뿐 아니라, 심리적 행복이 해결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계급 없는 사회란 정치와 경제의 해방 뿐 만 아니라, 성 그리고 심리의 해방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노동 민주주의의 사회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회는 시민주의의 성 윤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난 뒤에 새로운 성 윤리가 주창되어야 현실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성 윤리란 자기 조절에 바탕을 둔 성 경제학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이히의 책 『성의 혁명』은 소련 혁명 이후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아쉽게도 스탈린 시대에 자취를 감춘 새로운 성 생활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1933년에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간행합니다. 이 책에서 라이히는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궁극적으로 인간 심리의 파행적이고도 왜곡된 정서인 “질투”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의 『권위주의 성격에 관한 연구The Authoritarian Personality』(1950)보다 어언 17년을 앞서고 있습니다. 파시즘의 도래가 개인 심리가 아니라, 사회적 동인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은 라이히와 아도르노의 공동된 견해였습니다. (Adorno: 678). 어쨌든 이 책을 발표한 후부터 라이히는 더 이상 독일 공산당과 제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히틀러의 권력 추구의 심리를 해명했는데, 이는 독일 공산당의 견해에 의하면 무산계급을 배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은 단체를 강조하면서 개개인의 자율적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산당은 나치의 전체주의 비판이 당 내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될까 우려했던 것입니다.

 

8.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2): 라이히가 나치의 폭력을 피해서 노르웨이로 이주했을 때, 사람들은 탁월한 생물학자, 성 과학자를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라이히가 실험 교육의 주창자인 알렉산더 닐 Alexander Neill을 만난 것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닐은 자신의 심리 상태에 이상이 있음을 알고 아일랜드에서 노르웨이로 건너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평생의 우정관계가 맺어집니다. 오슬로의 실험실에서 라이히는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담긴 쾌락과 공포의 본질을 찾아 나섭니다. 그곳에서 그는 의학자 루드비히 로베르트 뮐러의 “심장, 혈액 순환, 소화 그리고 호흡에 위험할 정도로 반응하는 생장의 신경조직 연구”를 수용합니다. (Müller: 23). 이때 노이로제 질병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반응이 집중적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채택한 것은 “식물 (무의식)의 치료vegetative Therapie”라고 명명된 바 있는 물리적 심리치료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