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현대불문헌

서로박: 쥘리앵 그린의 "표류물" (1)

필자 (匹子) 2023. 2. 17. 10:45

1. 끈 떨어진 뒤웅박: 쥘리앵 그린 (Julien Green, 1900 – 1998)은 20세기 전반부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가인데, 작품의 특성은 삶의 깊은 의미를 냉엄한 필치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작가, 프랑스와 모리아크 (Francois Mauriac, 1885 - 1970)를 방불케 합니다. 그린의 부모는 청교도 신자인 영국계 미국인인데,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그린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1914년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시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그린의 관심사는 이성에 교묘하게 작용하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고도 냉철하게 서술하는 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묘사하는 세계는 아무런 출구가 없는 감옥과 같은 세상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신에게서 그리고 동시대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채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군들입니다. “참다운 힘은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나의 바람직한 삶은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시각은 결코 밝거나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삶의 본질적 의미가 비극적인 세상에서 힘든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2. 그대 또한 고해의 바다에서 부유하는 표류물 하나이다.: 쥘리앵 그린이 젊은 시절에 특히 파스칼의 『팡세Pensées』에 경도해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불안에 휩싸입니다. 이러한 불안은 평생 이어집니다. 태어나는 일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한 작가는 소포클레스만은 아니었습니다. 태초에 인간이 종교를 선택한 까닭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인위적인 방책인 것은 분명합니다. 가령 그린의 작품에는 신앙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즉 신앙에 침잠하면, 인간의 인간성은 의외로 파괴되곤 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죄악을 척결하려는, 과도한 의지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욱더 깊은 사악함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집요한 믿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바로 사악함이라는 인간 정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쥘리앵 그린이 반종교주의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작품 『표류물Épaves』(1932)은 인간의 자기 폐쇄적이고 무감각한 마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냉담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3. 버림받은 존재로서의 인간: “표류물”은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프랑스어로 “epaves”란 “낙오자”, “잔해” 등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필자는 그의 소설을 “표류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잔해”라고 표현하면, 고해의 바다와 관련되는 우울의 정서가 감추어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번역가, 김종우씨는 이 작품을 번역하여 2011년 『잔해』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표류물』은 인간의 무감각하고 이기적인 사악함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놀라운 필치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린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다음에 정신과 육체 사이의 이원론적 갈등에 관해서 깊이 천착했는데, 이러한 고뇌의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소설에는 어떠한 극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아무런 구원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사악한 인물들은 그야말로 무심하게 온실 속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범행을 저지를만한 에너지도 없으며, 그저 아무런 해결책이나 구원 없이 세월을 허송합니다.

 

4. 필리프의 무기력함: 주인공은 필리프 클레시라는 남자입니다. 11년 전부터 아내 앙리에트와 그미의 언니인 엘리안과 함께 파리의 어느 집에서 생활합니다. 부모의 유산으로 사업체를 경영하는 그는 소극적이며 무기력한 본성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필리프는 센 강변을 산책했는데, 이때 제발 자신을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여인과 마주칩니다. 이때 필리프는 이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는 처형인 엘리안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필리프는 길에서 만난 낯선 여인에 관해서 침묵하면서 그미와 담소를 나눕니다.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엘리안이 처하고 있는 삶의 정황입니다. 엘리안은 왕년에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그로부터 돌아온 것은 절망적인 배신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미는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사랑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제부인 필리프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필리프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고 다시 낯선 여인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로 향합니다. 강변에는 어두움과 적막함이 가득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주인공에게 엄습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무기력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5. 앙리에트의 미성숙 그리고 퇴행: 주인공의 아내인 앙리에트는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다고 나중에서 등장합니다. 그미는 심리적으로 여전히 미성숙한 여인인데, 필리프와의 사랑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앙리에트는 하나의 완전무결한 기쁨 내지는 최고의 희열이 행복의 결과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는 충족될 수 없는 완전성이기 때문에 그미는 항상 우울합니다. 부유한 앙리에트는 돈을 뿌리면서 삶을 즐기려고 하는데, 우연히 젊은 내연남을 “플러팅Flierting”하게 됩니다. 앙리에트가 일시적으로 데리고 놀기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돈만 몇 푼 건네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해주는 제비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앙리에트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화려한 축제에 참석하여 그와 함께 여흥을 즐깁니다. 그미의 눈에는 남편이라는 작가는 힘없는 풀주머니로 비칠 뿐이지요. 그미의 언니인 엘리안은 그들의 중간에서 마치 하녀처럼 두 사람 사이의 연락책으로 활동합니다. 무기력한 한 사내 그리고 허영심 많은 열정적인 두 여자 -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쥘리앵 그린의 사적인 삶의 체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6. 무성영화의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지루한 비극: 소설의 중간부에 이르면 아들 로베르가 등장합니다. 로베르는 평소에는 학생 기숙사에 머무는데, 이번에 잠시 방학을 맞이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로베르 역시 어린 시절부터 두 여인에 의해 응석받이로 자라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거나 이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발설하지도 못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객체라고 할까요? 로베르에게는 삶의 추진력이라고는 추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부유하므로 돈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마약에 손을 대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작가는 네 명의 등장인물의 뒤틀린 삶을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놀라울 정도로 시적으로, 아니 암시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때로는 독백, 때로는 대화 등으로 얽혀 있는가 하면, 등장인물의 내적 감정은 섬세한 시적인 묘사로써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필리프와 다른 인물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영위되는 절망적인 삶은 마치 기괴하게 전개되는 무성영화의 파노라마를 방불케 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