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현대불문헌

서로박: 쥘리앵 그린의 "표류물" (2)

필자 (匹子) 2023. 2. 17. 10:47

7. 상호 의존적 인간 그리고 사랑으로 향하는 방랑: 필리프는 자신의 권태를 달래기 위해서 자주 영화관을 찾는데, 이러한 장면 역시 주인공의 지루한 비극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루함은 필리프의 경우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어떤 불안과 연결됩니다. 필리프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실패한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절망을 파악하고 이해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필리프는 아들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두 남자는 이런 식으로 제각기 위태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무기력함은 아들의 존재라는 무의미한 받침대에 지탱하게 되고, 아들의 무의지는 편안함을 보장해주는 아버지의 재산에 의해 수동적으로 채워진다고 할까요? 엘리안은 집을 뛰쳐나가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미의 사랑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안에게 사랑이란 어떠한 결함도 용인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리석고 불쌍한 사랑의 노예는 허망한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8. 끝내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타자에 대한 냉담과 권태로움을 떨치면서 무언가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엘리안은 더 이상 사랑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자살하려는 공상에 사로잡힙니다. 여동생에게 제부인 필리프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앙리에트는 충격을 받고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미의 이러한 행동은 로베르의 방해로 인해서 무산되고 맙니다. 필리프는 로베르를 데리고 아내의 내연남을 찾아갑니다. 그를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여의치않을 경우 칼부림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리프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고, 그냥 귀가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감행할 이유는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 그리고 비겁함 때문입니다.

 

9. 필리프,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다.: 다음날 필리프는 신문에서 센 강에서 익사한 여인에 관한 기사를 읽습니다. 그는 불행한 여인에게 아므런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실토했을 때, 엘리안은 제부의 나약한 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그에게 몸을 던집니다. “갑자기 그미는 맹렬한 욕망으로 그에게 달려들어서 입을 맞추었다. 이는 마치 호랑이 한 마리가 먹잇감으로 향하여 돌진하는 것 같았으며, 상대방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안은 상대방에게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맞춤은 아무런 결과 없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마지막 장에서 필리프는 아들과 함께 센 강을 산책합니다. 일순간 그의 뇌리에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스쳐 지나갑니다. 뒤이어 그는 엘리안의 사랑고백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강물에 손을 담그자, 그는 어떠한 불안과 두려움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감지합니다. 일순간의 감정일까요? 등장인물들의 이후의 삶은 이런 식으로 은폐되고 맙니다.

 

10. 최소한의 긍정적 여운은 로베르에게서 발견된다.: 쥘리앵 그린의 소설 가운데 이 작품만큼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집요하게 다룬 작품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대한 무-감각이고, 두 번째는 타인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이며, 세 번째는 개인적 자유를 상실하게 만드는 인습이라는 사슬을 가리킵니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살아서 죽어 있는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린의 묘사는 치밀할 정도로 정교합니다. 이를 서술하기 위해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내면과 주위 정황을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쥘리앵 그린은 이 책의 제목을 처음에는 “황혼Crépuscule”이라고 명명하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환영chimére”을 뜻하는 그 개념을 통해서 작가는 모든 감정을 은폐하는 노이로제의 인간군을 암시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세 명의 인물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로베르만큼은 긍정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의 부드러움은 역겨움과 파렴치한 인성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11. 마지막 사족의 말씀: 인간의 불행,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은 실제 삶에서 자주 속출하는 감정입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는 자는 흔히 그 이유를 외부적 삶에서 찾거나 타인의 삶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갈구하는 무엇이 충족되지 않거나, 자신의 처지가 타인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심리적 아픔을 느낍니다. 만약 무언가를 과도하게 탐하지 않거나, 삶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믿는다면, 괴로움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 계층에 속합니다. 어째서 이들이 세상에 대해 그렇게 무감각하고 자기 폐쇄적인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서구라고 해도 불행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은 자리하는 법입니다. 언젠가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 삶의 가장 구체적이고 절실한 가치는 가까이 있는 이웃의 아픔을 감지하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그들을 도와주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