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걸어온 길을 알고 싶지 않아요.
임이여! 그대가 가지고 온 것은 좋았으니까요.
맨발의 나, 그대는 눈물을 가득 흘려
그대의 머리칼로 일순 내 발을 싸안았어요.
아니, 묻지 않을 게요, 그대가 이전에
무엇을 대가로 그대의 향유를 구입했는지.
나는 알몸이었어요, 그대는 - 마치 파도와 같이
나를 칭칭 감았지요 - 나의 옷이었어요.
그대의 알몸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리고 있어요.
물처럼 조용히, 풀처럼 깊숙하게 ...
나는 바로 서 있었지만, 그대를 애무하도록
몸 구부려야 했어요, 도에 지나치게.
그대의 머리칼 속에 내 구덩이 하나 파야 해요,
나를 휘감아 봐 - 아무런 수건도 없이.
향유를 가져온 여인이여! 세계와 향유가 내게 뭐람?
마치 밀물처럼 나를 씻겨낸 분은 바로 그대였지요.
О путях твоих пытать не буду,
Милая! — ведь всё сбылось.
Я был бос, а ты меня обула
Ливнями волос — И — слез.
Не спрошу тебя, какой ценою
Эти куплены масла́.
Я был наг, а ты меня волною
Тела — как стеною Обнесла.
Наготу твою перстами трону
Тише вод и ниже трав...
Я был прям, а ты меня наклону
Нежности наставила, припав.
В волосах своих мне яму вырой,
Спеленай меня без льна.
— Мироносица! К чему мне миро?
Ты меня омыла Как волна.
너: 예수 그리스도가 시적 자아로 등장하는군요. 참으로 기이합니다.
나: 놀라운 것은 츠베타예바가 남성 (예수)의 관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고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대가 걸어온 길을 알고 싶지 않아.” 새롭게 조우한 임이 과거에 무슨 사랑을 나누었는가? 하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 예수는 마리아 복음서에서 나타난 “(새로운 위대한) 인간 ανθρωπος”으로 등장하는군요. 그는 맨발 차림에 변변한 옷조차 걸치고 있지 않습니다.
나: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이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남자로 묘사되고 있어요. 그에게는 돈도, 높은 직책도, 화려한 귀족 신분도 주어져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그미가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따뜻한 마음과 사려깊은 판단력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머리칼은 그리스도의 “신발”이 되고, 그미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외투 내지는 “옷”으로 활용됩니다. 이러한 묘사는 마치 구원이 놀랍게도 남성인 예수에게서가 아니라,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비롯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너: 그렇군요. 사랑을 통한 구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남성이 아니고 여성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랑의 삶을 주도하는 피조물은 자연에서도 나타나듯이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지요. 사람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습니다.
나: 시인은 동등한 동반자 관계를 중시합니다. 이는 어쩌면 러시아 정교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요?
너: 그럴듯한 지적입니다. 사랑을 통한 진정한 구원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정교의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츠베타예바는 러시아 정교의 열정적이고 에로틱한 요소를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그리스 시대의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에로스를 통하여 신과 동일한 존재로 화한다고 합니다. 가령 막시무스 Maximus의 고백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의 에로스는 갈망 당하는 것을 갈망하고, 동경되는 것을 동경하며, 사랑 받는 것을 사랑한다.”
나: 에로스를 통하여, 신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헐벗은 예수에 대한 사랑 등은 러시아의 시문학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테마입니다. 이는 나중에 “붉은 영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상으로 귀결되기도 하지요. 츠베타예바가 가난하고 헐벗은 남자를 임으로 선택한 것은 붉은 영웅의 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너: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 -마치 D. H. 로렌스 D. H. Lawrence가 192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죽었던 그 남자 The Man who died」에 묘사된 것처럼- 아무런 조건 없는 선남선녀의 사랑 내지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에로스의 찬양 등으로 귀결된다는 주장은 분명히 어폐가 있습니다.
나: 물론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이 전적으로 남녀 관계의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가능성 내지 문학적 판타지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사랑은 최소한 러시아 정교의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범례를 통해서 수용되어 왔습니다. 인용 시를 고찰해 보도록 하지요. 제 2연에서 알몸의 남자는 여자의 존재를 자신을 가리는 “옷”으로 규정합니다. 제 3연은 두 연인의 포옹 그리고 성행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군요. 창피와 부끄러움이 없는 태곳적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방불케 합니다.
너: 네, “물처럼 조용히, 풀처럼 깊숙하게”는 겸허함과 신중함을 드러내는 러시아어의 상용어라고 합니다.
나: 재미있는 지적이로군요. 그리스도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제 4연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유추하게 하는 시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덩이”는 통상적으로 무덤을, “수건”은 수의 壽衣를 연상하지 않습니까? 1행과 2행에서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 머리칼로 “구덩이 하나”를 만들어서 자신을 감싸줄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성과 육체가 공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요한의 복음서」20장 17절과 전적으로 대비됩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는 마리아에게 “아직 성부에게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복음서 구절은 시신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어요.
너: 논의에서 벗어난 말이지만, “나를 붙잡지 말라 Noli me tangere”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육체성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의 사후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가현설 Doketismus”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나: 그에 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일단 츠베타예바의 시에 머물기로 하지요. “머리칼 속에” 구덩이를 파서 나를 감싸달라는 요구사항은 근본적으로 “나를 붙잡지 말라.”라는 전언과 정반대로 이해된다는 말씀인가요?
너: 가급적이면 우리는 츠베타예바의 작품을 하나의 문학적 판타지로 수용해야 합니다. 시에서 묘사되는 예수그리스도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만남과 사랑은 하나의 비유에 해당하지요. 그리스도의 정신이 마리아에게 이전되는 과정으로서의 비유 말입니다.
나: 동의합니다. 성서의 내용을 자구적으로 해석하고 이에 집착하면 남는 것은 항상 억측밖에 없지요. 츠베타예바의 시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예수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애틋한 사랑은 하나의 문학적 비유이지, 자구적 표현을 둘러싼 신학적 쟁점으로 비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츠베타예바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로 성 평등의 유토피아의 상, 둘째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갱생 更生의 상입니다. 특히 후자는 삶의 변화 가능성, 더 나은 인간으로서의 변신을 가리킵니다. “과거의 나”에서 “더 나은 새로운 나”로 변모하는 일 -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역동적 특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너: 그렇습니다. 기독교 사상의 역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속죄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이 바로 마리아 복음서의 전언이 아닙니까? 기독교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운명을 개척하는 특성을 지니지요. 요나의 40일 간의 회개와 니느웨의 구원을 생각해 보세요. 이에 비하면 카산드라의 숙명은 비정한 여신 모이라 μοιρα에 의해서 그 자체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나: 그렇군요.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더 나은 인간으로 변신하여 살아간다는 점, 그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생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비하면 시몬 마구스 Simon Magus와 사바타이 체비 Sabatai Zewi의 재림 내지 오늘날 난무하는 휴거에 관한 거짓 예언은 비판받아야 마땅하겠지요.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겸허하게 수용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맹목적으로 모방하고 추종하려고 하였으며, 사제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성서 속의 체제옹호적인 구절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야 말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즐거운 삶에서 고통스러운 굴레의 삶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퇴행 Regression”으로서 후세에 살아가는 우리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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