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작은 출구

필자 (匹子) 2021. 5. 11. 11:16

깊이 잠이든 사람 역시 혼자 있다. 물론 그는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그렇게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잠자지 않고, 술집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벽을 뒤로 하고, 술집 내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게 하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잠이 들 때 주위를 완전히 차단시킨다. 이로써 그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어두운 방에서 등을 돌리며 잠을 청한다. 우리는 잠들 때 마치 벽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마치 방이 스스로 무기력하게 변하는 것처럼 느낀다.

 

잠은 마치 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더 나은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무엇을 가리킨다고 할까. 잠은 외부의 방해와 낯섦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치 죽음을 배우는 행위처럼 보인다. 물론 잠의 무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잠은 고향에 관한 변증법적인 상을 개방시킨다. 실제로 죽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구조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 바 있다.

 

비몽사몽간에 장벽에 기대고 있었어요. 내가 방에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바깥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장벽 안에는 내 물건이 발견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어요.” 나중에 그 남자에게 기상천외한 상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마치 “죽음의 상태 속에서in statu moriendi” 죽음의 어떤 조직체가 형성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장벽이 뚫렸던 것이다.

 

죽기 직전의 사람은 마치 자신이 장벽 안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어떤 새로운 눈 (眼) 하나가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회교 승려가 향유로써 절벽의 암석과 산맥의 내부를 칠해놓은 것 같았다. 그 내부는 현세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었는데, 신비로운 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장벽의 내부는 몹시 협소했다. 그렇지만 죽음을 맞이한 자의 뒤집어진 감각기관들은 그 내부에서 놀라울 정도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구 그리고 해방 - 그래 이에 관한 하나의 비유는 다시 첨예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병상을 떠나는 것은 어떤 바깥으로 떨어져나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어쩌면 그것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느낄 수 있는 멀어지는 상태라고나 할까. 흔히 여행을 떠나는 자는 열차에서 플랫폼으로 내려와, 혹은 기차에 오르기 전에 전송하는 자와 잠깐 담소를 나눈다. 이때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내밀하고, 내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감정을 지닌 자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 즉 떠나는 자의 마음이 마치 화살처럼 설레는 반면에, 남아 있는 자의 마음은 마치 달걀과 같이 깨질까 불안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죽음으로 이별하는 두 사람은 이미 완전히 다른 영역에 머물고, 이들의 공간은 서로 방음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들은 다른 공간, 다른 구부러진 길 그리고 다른 형체로 서성거리는 셈이다.

 

여행을 떠나는 자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반면, 그를 전송하며 한 곳에 머무는 자는 대부분의 경우 슬픔의 정서에 침잠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때 그들의 마음은 거의 변함없지만, 이는 떠날 때의 경우와는 약간 다르다. 방문객은 새로 맞이할 나날에 거의 눈이 멀어 있지만, 방문객의 친구는 그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가르치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 거대한 배를 타고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낯선 지역에 도착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실망감과 공허함이 뒤섞인 착잡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 지역은 우리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이한 영역이 아닌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행복을 얻으리라는 기대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듯이, 죽어가는 사람 역시 어쩌면 좋은 지역에 당도하리라는 즐거운 기대감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박이 찬란한 음악이 들리는 장소에 정박하게 되면 어떨까? 소시민들이 즐겨 읽는 통속 소설 속에는 언제나 즐거운 환호성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죽은 자 모두가 다시 부활하리는 가능성과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 살아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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