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레즈비언, 알베르틴느에 대한 사랑: 일찍이 찾아온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마치 주인공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마르셀은 우연한 기회에 시민 계급 출신인 처녀, 알베르틴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이 순간부터 알베르틴느에게 깊고도 강렬한 연정을 느끼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미를 만나 구애하지만, 알베르틴느는 이미 다른 여자 친구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임이 있었습니다. 알베르틴느의 연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었습니다.
마르셀은 일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심합니다. 그미와 결혼하여, 알베르틴느의 어떤 병적 성향을 치유해주리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기이한 동성연애의 증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미는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그미에게 보험용 남자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때로는 그처럼 달콤하지만, 때로는 쓰라린 독약과도 같았습니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이 온몸을 쓰라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르셀의 마음을 내리누르던 격렬한 사랑의 열정은 서서히 약화됩니다.
9. 사랑의 고통, 연인의 죽음: 사랑의 괴로움, 이로 인한 번민은 주인공의 내면에서 어떤 가학의 감정으로 돌변합니다. 마르셀은 어느 날 기지를 발휘하여 알베르틴느를 유혹하여 방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미를 자신의 포로로 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미는 방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자신의 곤충 표본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박제의 나비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 상태에 빠진 주인공은 나비 한 마리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주인공은 놀라운 사실을 접합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미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서 즉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르셀은 어떤 비가시적인 소명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을 장편 소설을 재현시켜야 한다는 계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마르셀은 예술가로 문학 작품 속에 다루어지게 됩니다. 예술가의 내면을 형상시키는 작업 - 그것은 한편으로는 한 인간이 어떻게 성숙해나가고 교양을 쌓는가에 답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목표 없이 우연히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은 얼마나 찬란한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0. 에피소드 그리고 다시금 에피소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화자가 이끌어낸 흐릿한 줄거리의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악보의 배열처럼 다양한 모티프 그리고 이질적인 주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변 이야기들은 마치 소설 속에 담긴 독자적인 소설처럼 뒤엉켜 있어서 엄청난 내용으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의 내용들은 그 자체 서로 뒤엉킨, 시적으로 형상화된 복합적인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처음에 그리로 다가가기 힘이 들지만, 서서히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문학적으로 직조된 세계를 접하게 되면, 작품의 미학적 놀라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에다 어떤 거대한 사회적 이야기를 첨부하였습니다. 문학적 세계, 놀라운 가상적인 우주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오노레 발자크의 『인간 희극Comédie humaine』 시리즈 소설과 비견될 수 있습니다.
11. 하찮게 보이는 기억 속의 가상: 작품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느 등장인물이 100페이지 이후에 다시 언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1987년에 이르러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 사전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약 130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프루스트의 작품이 전통적 심리 소설의 경우처럼 본성에 합당하게 모든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모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체험에서 망각된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서 소설을 집필하였습니다. 망각된 무엇은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하찮은 것일지라도, 예술가에게는 더 없이 귀중한 추억의 상과도 같습니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귀중한 현실의 상을 재발견하여, 이를 이해하고, 재확인하는 데 있다. 우리가 일상에 함몰해서 살아가는 동안에 귀중한 현실의 상은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서, 더 이상 파악하지 못하는 흐릿하고 막연한 가상으로 남아 있지 않는가? 이러한 구체적 형상들은 비록 우리의 삶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시점에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진정한 인식일 것이다.” (제 VII권 되찾은 시간: 327).
12. 몰락의 아름다움, 무너지는 귀족 사회의 상들: 물론 프루스트가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서술하는 것은 사회적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속하는 관료주의자들의 삶의 흔적입니다. 그래, 프루스트가 묘사한 것은 20세기 초에 자신의 기득권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서서히 쇠락의 길로 빠져든 귀족 엘리트, 관료주의자의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루스트는 엘리트 관ㄹ주의자의 세계관 자체가 그다지 의미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시민사회의 상류층의 세계는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의 표현을 빌면- 비록 몰락을 맞이하기는 하지만, 황혼의 멋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는가요?
가령 작품 『게르망트 쪽』에는 두 사회 계급이 등장합니다. 그 하나는 귀족이라는 관료주의의 계급입니다. 바실 드 게르망트 공작, 그리고 그의 부인 오리앙, 캉브러머, 노르프와, 로베르 드 상 루프 등이 이들에 해당합니다. 상류층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공작의 남동생, 드 사를 뤼 남작이 있습니다. 남작은 미적인 유미주의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족과는 다른 부류의 사회계급은 말하자면 시민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거대한 부를 차지한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예술적 기질을 지닌 섬세한 스완 그리고 그의 아버지 블로흐가 있습니다. 이들은 베르뒤링 가족의 거대한 양쪽 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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