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418) 니체는 있는데, 클라게스는 없다.

필자 (匹子) 2019. 2. 21. 10:11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한 몇몇 교수들의 집착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물론 21권으로 이루어진 니체 전집 간행은 문헌학적 수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서양 철학의 핵심적 논거를 파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니체는 이방인의 자세로 서양의 철학적 문화적 두 줄기인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원천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플리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흐름 대신에 페르시아의 사상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을 도출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초인의 정신은 파시즘의 의혹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 혐오를 도출해낸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 그리고 하이데거 등의 허무주의의 철학적 논거와 함께 현대적 관점에서 비난 받아야 마땅합니다. 가령 쇼펜하우어는 "여성에게 갈 때는 채찍을 지참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일갈했는데, 니체는 이를 자신의 책에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여성은 욕망 해소를 위한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습니다. 니체는 홍등가에 들락거리다가 결국 매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요약하건대 니체의 사상은 막스 슈티르너 Max Stirner의 사상의 아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초인 사상은 소시민적 유일자를 추구하는 슈티르너의 무정부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통 속에서 국가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던 디오게네스의 입장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니체의 이러한 소시민적 체제비판의 요소를 예리하게 지적하던 사람은 무의식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 Eduard Hartmann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철학자, 하르트만은 20세기 형이상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 Nicolai Hartmann과는 동명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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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삶의 철학자, 심리학자 루드비히 클라게스 (1872 - 1956)이며, 오른쪽은 무의식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 (1842 - 1906)의 모습이다.

 

니체 철학의 가장 큰 하자는 그가 수수방관적으로 서양 철학의 주류를 비판하지만, 어떤 생산 가능한 역동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자세에서도 엿보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그의 아이들은 서양의 도구적 이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런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에른스트 블로흐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블로흐는 페르시아의 종교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선한 정신 Vohu Mana"에 의한 어떤 세계 구원 내지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의 단초를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중요한 학문적 대상이 마냥 방치되고, 철학의 이방인, 니체가 모든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니체는 소개되는데, 어째서 루드비히 클라게스는 소개되지 않는가요? 클라게스의 "영혼의 대척자로서의 정신"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문헌이 아닌가요? 게다가 그의 책 인간과 지구는 오늘날의 생태주의 사고를 선취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물론 클라게스의 사상 속에 반유대주의적인 취약점이 은밀히 자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공감의 심리학적 관점은 마샤 너스바움의 인문학적 공감 이해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만이 중시되고 의향이 무시되는 학문적 풍토에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