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본서의 내용 (5)
제 14장 「정서적 능력. 성소수자에 대한 불편한 시각」은 말 그대로 정서적 능력과 사회적 관계를 다룬 글입니다. 감성지수야 말로 질병을 사전에 예방하고 간접적으로 치료해주며, 나아가 대인관계 그리고 사회성을 결정짓는 덕목으로서의 배려 등을 함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위한 계획 내지 성공을 위한 노력이 삶의 수직 구도로 측정될 수 있다면, 공감과 배려의 덕목이야 말로 인간관계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고 사회적으로 적응하게 할 수 있는 요인입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필자는 사회의 건강성의 척도는 역설적으로 성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관대한가? 하는 물음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제 15장은 생태주의 유토피아 그리고 생태 공동체에 관한 사항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치, 자활 그리고 자생을 기치로 내건 소규모 공동적 유토피아의 삶의 가능성입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전 지구상으로 널리 퍼진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독점 자본주의의 시대적 폭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맹위로 인하여 돈에 종속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21세기 남한에서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마치 당구공 두 개가 부딪쳤다가 순간적으로 떨어지듯이 재화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일회적인 만남과 이별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재화의 교환으로 형성되는 이러한 일회적 인간관계를 하루아침에 청산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소한 거대한 메가 시스템으로부터 가급적이면 경미한 영향을 받는 공간으로 일탈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주어진 시스템으로부터 낙오되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스스로 낙오자라고 선언하면서 생태 공동체를 결성한다면, 삶에 있어서의 대안은 반드시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대안은 노동조합의 운동 그리고 생태 공동체의 운동으로 실천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17. 물질 추구 이후의 시대의 새로운 윤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1): 친애하는 S, 앞에서 필자는 호모 아만스를 성의 차이, 나이 차이 그리고 인종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또한 필자는 미발표 저서, 『서양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20세기 후반부 이후의 세계를 물질 추구 이후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정치적 유토피아가 20세기 후반부의 시대부터 종언을 고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인류는 자연 재해와 자연 파괴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 사항은 호모 아만스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자세입니다. 그 하나는 생명 앞에서의 겸허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관용입니다. 첫째로 겸허함이란 겸손함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도를 추구하는 생태주의의 사고입니다. 생태계 파괴를 고려하여 우리는 멸종 생물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제기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명체 앞에서의 겸허함 내지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 언급한 바 있는 보존과 예방의 덕목으로서의 책임의 원칙일 수 있습니다. 요나스 외에도 지금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타자를 적으로 돌리고, 생명체를 단순한 먹이로 이해하는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18 물질 추구 이후의 시대의 새로운 윤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2): 둘째로 타인에 대한 관용이 중요합니다. 한반도에는 삽겹살, 즉 세 가지의 살 (殺)이 끼어 있습니다. 인간을 돈의 노예로 둔갑시키는 자본주의, 생명을 천시하게 하는 인간본위주의 그리고 가부장주의가 바로 세 가지 살입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선을 그어서 이웃을 배척하고, 타 인종에게 선을 긋습니다. 여성을 멸시하고, 성 소수자에게 손가락질하며, 오로지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사악한 적으로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게다가 집단 이기주의는 개개인을 마치 짐승처럼 취급하여 수직구도의 우리 속으로 몰아넣는 저열한 관습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경제적 토대를 향상시켜,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활하며,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는” 분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둘째로- 타자를 관용으로 대하는 자세입니다. 타인을 동등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관용은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을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게 하며,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천시당하는 사람을 격상시키게 합니다. 결국 타인에 대한 관용은 적개심을 극복하게 하는 평등 사회의 슬로건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소금은 주지하다시피 강한 알칼리 나트륨과 강한 염이 결합하여 중화된 성분으로서 인체에 반드시 적당히 필요합니다. 소금은 그만큼 호혜 중립적인 성분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두 인간 사이에서 상대방을 배척하거나 설득하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묵자墨子도 겸애兼愛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듯이- 상대방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모든 갈등 구도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의 자세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남한과 북한이 마치 소금처럼 평화를 추구하는 영세 중립국의 정책을 추진한다면, 이는 한반도 내외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불안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관용은 갈등과 반목을 줄여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5 사회심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 이야기, 혹은 루신데 (3) (0) | 2018.08.06 |
---|---|
결혼 이야기, 혹은 루신데 (2) (0) | 2018.08.06 |
결혼 이야기, 혹은 루신데 (1) (0) | 2018.08.06 |
Eugen Drewermann 우울에 관하여 (강연문) (0) | 2018.06.17 |
호모 아만스.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서문 (6) (0) | 2018.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