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자크 라캉: 팔루스의 의미 (5)

필자 (匹子) 2017. 7. 7. 09:31

(앞에서 계속됩니다.)_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개인의 특성을 갖춘다는 것 이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현대의 정신 치료학이 더 이상 목표로 지향하지 않는 무엇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적 욕구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연기되고 은폐되는 유희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타자 내지 성적 파트너에 대한 주체로서의 관계는 기표의 의미로 각인될 수 있습니다팔루스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특권으로 화한 기표입니다. 왜냐하면 열망이 제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이와 결합되는 것은 로고스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표로서의 팔루스가 우리에게 가장 근친한 개념으로 선택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주어진 현실에서 두 개의 성 ()을 하나로 일치시킬 때 그 개념을 떠올리곤 합니다. 다시 말해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성의 결합Kopulation”을 전제로 한 개념입니다. 이는 마치 자구적인 (인쇄 유형의) 의미에서 가장 상징적인 특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표로서의 개념은 논리적인 그리고Kopula”라는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이른바 페니스의 부풀어 오르는 특성 때문에 생명의 과잉이라는 특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근은 성적 욕망의 추구 외에도 종족 번식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상기한 바대로 기표로서의 팔루스 개념은 성에 관한 기능적 은폐 현상을 암시해줍니다. 그렇기에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자신의 역할을 계속 은폐하면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팔루스는 기능적으로 하나의 기표로서 파기되어 있는 , 모든 가능한 의미와 관련되는 잠재성의 부호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팔루스는 이러한 기능적 파기 자체를 가리키는 기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소멸됨으로써 자신의 특징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밖에 자신의 새로운 의미를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도스Αδώς의 사악한 영혼 (“수치심”)은 고대 그리스의 비밀스러운 공간 속에서 팔루스가 신비로움을 벗어던지는 바로 그 순간에 출현하고 있습니다. (가령 폼페이의 별장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생각해 보세요.) 여신 아이도스의 사악한 영혼은 손을 뻗어서 팔루스를 낚아채어, 대들보로 활용합니다. 이때 수치심의 악령은 팔루스에게 혼혈의 자식들이라는 기의를 부여하게 되고, 팔루스라는 각목에는 이와 유사한 기표들이 줄줄이 매달리게 됩니다.

 

주체를 돕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보완의 조건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상호 모순적이고 서로를 배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소화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분열의 현상 그리고 스스로 완결되려고 하는 중재 내지 간섭의 운동으로 해명되는 게 바로 보완의 조건들입니다.

 

이를테면 1. 주체는 의미하는 무엇이라든가 가시적인 무엇 등 모든 것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표기합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허상은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을 방해하므로) 문법적으로 문맥상으로 배척당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럼에도 자신의 무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2. 원초적으로 억압된 무엇 속에서 어떤 존재로 인하여 생동하는 것은 팔루스의 억압으로부터 어떤 각인된 특성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기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무의식적 사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언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성적 열망을 규정하는 척도를 설정하는 데 하나의 토대로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조화로운 구분이라는 중간의 그리고 외부적인 관계의 토대로서의 표현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표로서의 팔루스를 논리 그리고 시스템의 차원에서의 규칙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나의 발표문을 통해서 이에 관해서 수없이 많은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기표로서의 팔루스의 용어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던 경험의 반향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팔루스가 하나의 기표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즉 즉 그것이 타자의 자리에 존재하며, 주체는 그리로 향하는 입구를 지닌다는 사항 말입니다. 그렇지만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이미 언급했듯이 타자의 열망에 대한 척도로 작용합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사랑 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주체에게로 향하는 타자의 열망은 또 다른 기표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체 자체가 기표의 분열을 통해서 분할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심리학적 생성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출현은 팔루스가 지니고 있는 기표의 기능을 확인시켜줍니다.

 

상기한 방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이 처음으로 밝힌 사실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습니다. 즉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가 팔루스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의 사고의 발전 과정은 사랑의 요구 사항 그리고 성적 열망의 검증에 관한 변증법 속에서 정리되어 나갑니다.

 

사랑에 대한 요구 사항은 아이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사랑에 대한 요구 사항을 채워주려고 하다가 어떤 열망을 억눌러야 합니다. 이 경우 열망의 기표는 아이에게 무척 낯선 것입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팔루스를 열망하고 있다면, 아이는 이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스스로 팔루스이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성적 열망 속에 도사린 어떤 구분이 분명하게 눈에 띕니다. 이것은 타자의 열망을 통해서 분명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경우 주체의 욕망 충족의 성향은 타자의 욕망 충족의 성향과 분명히 어긋나고 있습니다. 주체는 타자가 실제로 팔루스와 일치되는 무엇을 실제 현실에서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열망을 충족시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가치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심리적으로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로써 내적으로 갈구하는 것은 팔루스가 됩니다.

 

(6, 7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