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자크 라캉: 팔루스의 의미 (2)

필자 (匹子) 2017. 7. 3. 11:25

(계속 이어집니다.)

 

이러한 무지는 표현의 기술적 의미에서 잘못된 인식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 타인에 의해서 현혹당할 때는 그러한 의심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어째서 인간의 성적 쾌락을 누리는 행위가 단 하나의 방식의 짝짓기로 규정될 수 있을까요? 성관계는 가령 롱고스Longos의 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에서 묘사된 바 있듯이 나이든 노파의 주문에 따라 성년식을 치르는 남녀 관계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몇몇 연구자들은 팔루스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습니다. 즉 팔루스는 시기적으로는 성을 거부하는 방어기제의 효과로 작용하며, 팔루스라는 객체가 상정하는 기능은 하나의 병적인 증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인가? 하고 물을 때 쉽사리 해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혹자는 이를 공포심이라고 하고, 혹자는 이를 성도착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모두가 뒤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경우 어떠한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어떤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흥미롭게도 변화되어 그 대상이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환자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그의 관심을 끌 경우 그게 구조상으로 다른 위치에서 어떤 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에게 객체 관계의 제목 하에서 현재 가장 즐겨 활용하는 관점 속에서 이러한 차이를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요청사항일 것입니다. 이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카를 아브라함Karl Abraham이 주장한 바 있듯이 오로지 근접 가능한 부분적 대상과 관련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카를 아브라함의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비판당한 바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1928년에서 1932년에 간행된 텍스트들을 다시 읽으면서 팔루스 단계에 관한 토론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열정을 제시할 수 있는데, 이는 차제에 이론으로 형성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정은 정신분석학 연구가 유럽에서 쇠퇴하여 미국으로 이전된 다음에 어떤 노스탤지어의 추가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연구 대상에 국한시켜서 논쟁을 통해 단순한 결론 사항만을 도출해낸다면 우리는 헬레네 도이치Helene Deutsch, 카렌 호르나이Karen Horney 그리고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등에 의해서 제기된 고유한 입장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단순히 표절하는 형국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어니스트 존스의 세 편의 논문은 팔루스 단계에 관한 테마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우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존스는 팔루스 단계를 설명하고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문용어 “(성적 욕망의) 소멸 aphanisi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팔루스 단계를 구명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그의 논문이 우리를 자극하는 이유는 다음의 사항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거세의 문제를 밝히기 위하여 특정 인간의 관계를 정확히 설정하려고 열망하는데도 불구하고, 존스는 인간관계에서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무능력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의 열쇠로 제공하는 소멸 내지 사라짐이라는 전문용어는 그 자체 자신의 결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학문적 성공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가령 존스는 프로이트의 단어 하나하나를 연구하여 엄밀히 따지면 프로이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특히 어떤 까다로운 연구 영역에서 과히 모범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컨대 존스는 얼핏 보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권한을 그대로 재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스가 “신이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였다.”라는 성서의 구절을 인지하면서, 더 이상 이에 관한 논의를 개진하지 않았다고 비아냥거리며,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존스가 정말 사실에 근거해서 팔루스의 기능을 규범화함으로써 과연 무엇을 획득했을까요? 

 

가령 그는 어머니의 육체 속에 내적인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팔루스의 존재를 소환해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어떠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내적인 대상으로서의 팔루스는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에 의해서 발견된 판타지에 의존하는 전문용어입니다. 멜라니 클라인은 가장 오래 전의 영아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역순으로 언어화시킴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판타지를 소환하려고 했습니다. 과연 존스가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써 클라인의 이론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일탈시킬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면, 이는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즉 과연 무엇이 프로이트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 속에 도사린 명백한 모순 사항을 드러내게 했을까 하는 질문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의 사항을 용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프로이트는 누구보다도 무의식적 제반 현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논리를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게 개진했습니다. 또한 이후의 학자들이 이러한 현상들의 본질을 충분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구분하고 치밀하게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구명하는 데 있어서 다소 방향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에게 하나의 내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러니까 7년 전 프로이트의 작품을 해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현상을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데 반드시 도입되어야 하는 작업은 시니피앙, 즉 기표라는 기본 개념을 확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단어가 현대의 언어학의 분석 작업에서 나타나는 시니피에, 즉 기의와 대립된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분석 방법은 프로이트 이후에 활발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이를 자신의 학문과 연결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발견이 자신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표현형식의 얼개를 선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어떤 완전한 이론을 인식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얼개를 기대할 수 없는 영역에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기표와 기의 사이의 대립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무의식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더욱더 효과적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니피앙, 즉 기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이론의 효과를 밝히는 데 있어서 적극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기표와는 반대되는 시니피에, 즉 기의가 자신의 특성상 고통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 기의로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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