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자크 라캉: 팔루스의 의미 (4)

필자 (匹子) 2017. 7. 5. 09:15

(앞에서 계속됩니다.)

 

이런 식으로 심리적 성적 욕구 속에서 파기되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원초적 억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가설에 의하면 자신의 요구사항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부수적 존재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내면적 열망le désir”으로 표현될 수 있는 무엇입니다. 지금까지 현상학적 연구 방식은 이런 식의 분석적 경험을 통해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열망에 가까이 있는 어떤 역설적인, 회피하는, 추론 가능한, 극단적인, 그래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데 아주 적당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열망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적 심리적 욕구와 구분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열망이 이러한 욕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정말로 훌륭하게 작동되는 실질적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열망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도덕주의자들을 언제 어디서나 설득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프로이트주의는 이러한 실질적 사실에 대해서 사회적 통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립시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의 일부 경향은 이는 매우 역설적인 사실입니다만- 시간과는 무관한 반-계몽주의의 첨단 영역에서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즉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심리적 성적 욕구를 축소화시켜서 이론적으로 실질적으로 열망의 영역 속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하나의 허구적 이상을 만들어서, 인간의 심리적 성적 욕구라는 실질적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여기서 명확히 밝히고, 일반 사람들의 성취되지 않은 욕망으로 인한 좌절을 추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단 한 번도 좌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없지만, 우리는 그가 연구하려고 하던 좌절의 개념 속에 도사린 고유한 특성을 고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요구 그 자체는 욕망을 충족하려는 욕구와는 약간 다른 측면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 성적 욕망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예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에 대한 원래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즉 어머니는 (아이라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데, 타자는 욕구의 이쪽 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원래의 관계는 처음부터 하나의 특권을 지닌 무엇으로 확정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처음에는 얼마든지 어머니의 품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은 서로 결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혼자서는 충족될 수 없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타자의 이러한 특권은 마치 자신이 지니지 못하는 선물과 같은 급진적인 형태로 표기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사랑으로 명명하는 그러한 형태로 말입니다.

 

통념으로서의 요구사항은 상기한 관계로 인하여 어떤 특수성을 파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충족될 수 있고 허용될 수 있지만, 주어진 현실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로 변모된 채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인간이 욕구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는 충족감조차도 깡그리 짓밟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욕구의 원래의 특성은 무시되고, 그 대신 출현한 사랑의 요청으로 인하여 갈가리 찢겨지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영유아를 돌보기 위한 심리학에서 완전히 감지되는 사항입니다. 특히 과거의 분석학자들은 이러한 사례를 고찰하면서 영유아를 돌보는 문제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학문적으로 반드시 구명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욕구의 특수성은 통상적 이론의 저편에서 다시 출현한다는 사례 말입니다. 주어진 사회 구조는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요구사항은 무조건적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적 심리적 욕구는 이러한 사회 구조가 온존하는 곳에서 계속 발생하고 출현합니다. 이는 가치 전도와 같은 현상으로서 부정의 부정이라는 특성과는 다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성적 심리적 욕구가 무가치하다고 판단되는, 이른바 무가치성oblitération”의 잔여물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상실의 힘이 출현한다고 할까요? 통상적 이론의 무조건적 타당성을 파기시키고, 그 대신에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은 한마디로 절대적조건으로서의 성적 열망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욕망이 충족되는 경우인데도 사랑의 증명이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 조건으로서의 성적 열망은 이러한 차단을 깡그리 없애줍니다. 열망은 이러한 방식으로써 욕구의 충족에 대한 요청도 아니고, 사랑에 대한 요구 사항 또한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차이 내지는 차이의 균열이라는 고유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개의 개체에서 하나의 개체가 떨어져 나오는 데에서 비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명확하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즉 성 관계가 열망이라는 폐쇄적인 영역을 어떻게 점령하며, 바로 그곳에서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숙명을 유희하게 하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사실 열망이라는 폐쇄적인 영역은 처음부터 성 관계라는 유희를 위해서 창안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주체의 내면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떤 의문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성의 관계가 주체의 입장에서는 열망의 이중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는 수수께끼 말입니다. 그 하나는 성적 관계로부터 야기된 통념으로서의 요구 사항이 통념의 요구로 재차 출현한다는 점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타자에 대한 요청받은 사랑의 증명 속에 도사리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모호한 특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그 자체 이중적 의미의 열망에서 야기된 것으로서 하나의 개방된 특성을 표방합니다.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간략히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체와 타자는 성 관계를 맺는 파트너 모두를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욕구의 주체들이거나 사랑의 대상들이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성적 욕망의 원인으로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실은 정신분석학이 저지르는 오류 가운데 핵심 사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몇몇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성생활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탐색하지만, 처음부터 어떤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실제로 개별적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하려고 합니다. 이때 성적 욕망은 그 자체 주체의 행복에 대한 전제 조건과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심 의 에너지를 신뢰함으로써,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의 에너지는 어처구니없게도 성숙된 인간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애틋한 사랑에 의해서 극복되고 맙니다. 성욕의 의향이 그런 식으로 경건한 무엇으로 돌변하게 되는 한 은폐된 성욕의 사랑은 어떤 사기 내지 현혹,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지금까지 이른바 생식기에다 (자신의 감정을 기만하는) 희생을 감내하는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가령 성욕을 도덕적으로 질책해 왔다고 말입니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의 영역에서는 구세군 교회에서의 찬가가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5, 6, 7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