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자크 라캉: 팔루스의 의미 (3)

필자 (匹子) 2017. 7. 4. 09:23

(앞에서 계속됩니다.)

 

기표의 이러한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밝혀줄 것입니다. 적어도 그게 무언가를 발설하는 인간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발설되는 “그것 ça”을 가리키는 한 그러합니다. 인간에 의해서 발설되는 그것 속에는 인간의 본성 속에 은폐된 어떤 효과가 뒤섞여 있는데, 이로써 우리는 언어의 구조를 재발견할 수 있으며, 그 소재가 되는 심리적 특성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반 이념의 심리학이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의 저편에서 어떤 의미에서 벗어난 발화의 상관관계가 메아리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의 발견의 결과가 이론적으로 단 한 번도 아직 제대로 예측된 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무의식의 발견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려 할 때 -설령 이러한 발견의 결과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여러 가지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측정되는 것보다도 더 강력한 범위에서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이론이 아직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껴왔던 것입니다.

 

기표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도입하는 행위는 통상적 표현의 의미에서 어떤 “문화주의”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카렌 호르나이는 팔루스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러한 문화주의를 프로이트에 의해 페미니즘의 입장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선취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인간의 관계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병적 증상의 이데올로기적 출현과 유사한 무엇에 관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한 바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적 증상의 출현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으며, 완전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대해 “비난 파기의peremptorisch” 요구에 의해서도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명칭은 우스꽝스럽게도 인간의 정서를 움직이게 작용합니다. 부언하건대 여기서 말하는 비난 파기의 요구는 흔히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를 요청하는, 이른바 “증명의 근거에 대한 요구사항petitio principii”을 가리킵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다른 현장을 지배하는 법칙 속에는 인간의 정서적 작용 내지 효과들이 재발견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마치 사슬과 같은 얼개 속에서 물질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들로서 발견될 수 있는데, 이를 구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어입니다. 정서적 작용 내지 효과들은 기표를 통한 결합 내지 보완이라는 이중적 유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두 개의 과정을 통해서 시니피에, 즉 기의를 생성하게 되는데, 기의는 결국 “변형된 명칭Metonymie” 그리고 은유에 의해서 구성되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라는 체제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정서적 효과입니다. 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의 의미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유형학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인식하게 되듯이- 표현의 분석적 의미에서의 어떤 병적 증상의 구조는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표기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가 타자를 통해서 발설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타자와 함께 무언가를 지칭하고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입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말하는 행위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면, 우리는 무의식과 관련되는 바로 그러한 특정한 장소를 소환해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심리적 증상이 타자를 통해서 발설되는 까닭은 자신의 귀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청하던 그렇지 않든 간에, 주체가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시니피에, 즉 기의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이전에 이미 논리적으로 기표라는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자리,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의 공간 근처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견이야 말로 하나의 대가로 어떤 균열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팔루스는 자신의 기능을 분명히 해명하고 있습니다. 팔루스가 상상의 효과로 이해되는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팔루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결코 판타지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팔루스라는 용어는 어떤 부분적 대상, 내적인 대상 그리고 선하거나 사악한 대상 등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게 어떤 감정적이고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이에 참여하는 현실적 기능을 충분히 고려하려고 의도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루스는 페니스라든가 클리토리스와 같은 생식 기관 자체를 지칭하는 육체적 기관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프로이트가 팔루스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대 사람들이 떠올린 “유사성의 상simulacrum”의 개념을 관련시킨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기인합니다.

 

즉 팔루스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기표이기 때문입니다. 팔루스의 기능은 개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기능적 유용성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씀드릴 수 잇습니다. 즉 어쩌면 신비로움 속에 내재해 있는 의미에 어떤 면사포를 드리우고 있다고나 할까요? 왜냐하면 팔루스는 하나의 기표로서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기의의 효과를 명명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정해지는 그러한 개념입니다. 실제로 시니피앙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기의의 효과를 드러내는 게 기표의 기능이 아닌가요?

 

기표가 현존함으로써 나타나는 효과들에 관해 더욱 정확하게 고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말할 때 자신의 내적 심리적 욕구는 적어도 말하는 내용의 요구사항 속에 가려져 있는 경우 “소외당한 채 aliéné” 파기되어 발화의 기의 속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언어적 발언의 효과는 내적 심리의 욕망으로부터 비켜선 채 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실의 종속성의 효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노이로제의 이론 속에 종속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종속성의 효과에서 어떤 유사한 입장이 발견될 수 있다고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표의 형체이며, 한 인간이 전하려는 무엇이 타자의 장소로부터 전달된다는 사실입니다.

 

(4, 5, 6, 7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