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라이제비츠의 "율리우스 폰 타렌트"

필자 (匹子) 2021. 12. 12. 11:26

친애하는 L, 작품 하나로 문학사에 남은 작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라이제비츠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요한 안톤 라이제비츠 (1752 - 1806)는 하노버에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770년에서 1774년까지 그는 예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시인 뷔르거 Bürger, 횔티 Hölty 보이에 Boie 등과 사귀었습니다. 1775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레싱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1776년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겨서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와 교우 관계를 맺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1785년 브라운슈바이크 영지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1780년 바이마르에서 괴테, 빌란트, 헤르더 등을 만났습니다.

 

1781년 라이제비츠는 소피 자일러와 결혼합니다. 1785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지역의 황태자 칼의 교사로 일했습니다. 1790년부터 행정관리의 경력을 쌓기도 합니다. 1805년 브라운슈바이크의 자선 단체의 대표로 일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극작품 「율리우스 폰 타렌트」는 질풍과 노도 시기의 비극적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은 상당히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론 이보다도 더 큰 호응을 얻은 작품으로서 우리는 아커만과 슈뢰더가 산문으로 발표한 클링거 원작 「쌍둥이들」을 들 수 있습니다. 라이제비츠는 그밖에 극작품 원고 및 희극작품 등을 집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원고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물론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은 지금까지 전해내려오지만 말입니다.

 

5막으로 이루어진 「율리우스 폰 타렌트」는 1774년에 씌어졌고, 1776년 6월 19일 베를린에서 초연되었습니다. 1775년 2월 28일에 함부르크 극장의 대표 F. L. 슈뢰더는 “형제 살인”에 관한 극작품을 공모하였습니다. 이때 라이제비츠는 극작품을 집필하여 응모했는데,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당선작은 클링거의 비극 「쌍둥이들」로 낙착되었기 때문입니다. 라이제비츠는 이 결과에 대해 몹시 낙심하고, 자신의 극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60년대 70년대에 극장의 레퍼토리로 활용되었습니다. 나중에 레싱은 이 작품을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하며, 틀림없이 괴테가 이 작품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일관성을 지닙니다. 타렌트 지방의 제후, 콘스탄틴은 몹시 황당한 경우와 조우하게 됩니다. 자신의 두 아들 율리우스 그리고 귀도가 똑같이 어느 아름다운 처녀 블랑카를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 율리우스는 황태자이며, 풍부한 감정을 지닌 몽상가인 반면에, 둘째 아들 귀도는 야심 많고 청년입니다. 그런데 블랑카는 두 명의 신랑감 가운데 은근히 황태자인 율리우스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동생 귀도는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형에 대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귀도는 왕궁의 법도에 따라 여성에게 선택권을 주어서 모든 것을 결정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습니다. 나이든 왕은 아들 사이의 심각한 갈등을 미리 간파하고, 블랑카를 수도원에 보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행동한 제후가 결국 불행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두 형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겸연쩍게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내적 감정은 서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귀도는 강건한 사내로서 이미 군대의 장수로서 전과를 올린 바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용감성의 대가로 주어지는 전리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율리우스는 무척 소심한 편이었습니다. 황태자로서의 의무를 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심장이 요구하는 대로 오매불망 그미를 못 잊어 합니다.

 

율리우스의 친구이자 은사인 아스페르몽 백작은 그의 마음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그는 율리우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가서, 율리우스에게 과단성을 발휘할 기회를 줍니다. 율리우스에게 행한 충고는 과감하게 행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마침내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블랑카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즉 한달 내에 아버지에게서 결혼의 허락을 받겠다는 게 바로 그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우스는 일순간 당황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장차 신하가 될 동생의 간곡한 요구를 거절해야 마땅한가? 하고 자문합니다. 말하자면 동생 귀도는 여전히 자신이 블랑카의 신랑감이라고 말하며, 그미와의 결혼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리우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배필감으로 블랑카의 친구, 체칠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율리우스는 친구 아스페르몽의 동의하에 블랑카와 지구 끝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귀도는 형의 이러한 계획을 알아차립니다. 율리우스가 변장을 한 채 부하들과 함께 수도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귀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귀도는 상대방이 자신의 형인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연인의 죽음을 접한 블랑카는 그만 순간적으로 기절합니다. 그미가 깨어났을 때 그미는 광녀로 변해 있었습니다. 귀도는 너무나 끔찍한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형제 살인의 죄를 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콘스탄틴은 아들의 고해를 청취했지만, 설령 왕이라고 해도 국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끌어안은 채 처절한 마음으로 둘째 아들을 죽입니다. 그 후에 왕은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요한 안톤 라이제비츠 (1752 - 1806). 그는 오랫동안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법률가로 활동하였다.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의 친구.

 

라이제비츠는 역사적 소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실제로 플로렌스의 대공작 고시모 1세 드 메디치는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두 아들 요한 그리고 가르시아스는 실제로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라이제비츠는 역사가 투 (Thou)가 쓴 『그 시대의 역사 (Historiae sui temporis)』 (1604 - 1608)의 제 2권을 원용했던 것입니다. 특히 루소의 『새로운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가 라이제비츠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루소는 이 작품에서 계몽주의의 이성의 법칙도 중요하지만, 인간 영혼의 거대한 갈망 역시 이에 못지않은 강렬한 정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열정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이제비츠는 사랑의 감정을 사회적 규범과 모순되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훌륭하게 표현해냈던 것입니다. 라이제비츠는 연극학적 관점에서 레싱의 극작품 「에밀리아 갈로티」와 연관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비록 작품의 주제가 질풍과 노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라이제비츠의 작품은 나중에 실러의 「메시나의 신부 혹은 적대적인 형제」 (1803)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