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혁명 위원회의 새로운 법 규정 (1): 데자크는 다음의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 지배 없는 코뮌 사회는 유럽의 시민사회에서 과도기적으로 이전되지 않고서는 결성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무엇은 주어진 무엇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하지, 무의 심연으로부터 우연히 돌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1794년 프랑스 혁명 뒤에 나타난 혁명 위원회의 결정 사항은 그에게 무척 중요했습니다. 자고로 모든 사회적 개혁을 실현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은 하나의 새로운 법을 공표하여 이를 실시하는 일밖에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법 규정이야 말로 새로운 사회적 삶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권력 메커니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데자크는 혁명 위원회의 15개의 법 규정의 초안을 만드는 데 가담한 바 있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데모를 벌인 파리 시민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첫 번째 규정은 인민의 주권과 관련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주권은 인민의 나이 그리고 성별과 무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게 데자크의 지론이었습니다. 인민의 주권은 어떠한 무엇에 의해서도 공격받지 말아야 하며, 타인에게 이전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7. 혁명 위원회의 새로운 법 규정 (2): 두 번째 조항은 장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새로운 공화국의 분할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공화국은 수많은 코뮌으로 구분되어야 하는데, 각 코뮌에는 오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보편적 사항에 관해서는 인민들 모두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해야 하지만, 코뮌의 지엽적 문제들에 관해서는 공동체의 분과 위원들이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분과로 나누어져 있는 까닭은 주어진 사안에 대해 신속 정확한 해결책을 찾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Déjaque 40).
제반 공직 기관들은 해당 코뮌 내지 전체적 코뮌에서 보낸 사람들에 의해서 영위될 뿐,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권한을 함부로 행사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은 엘리트 법관들이 아니라, 판결 위원회에 소속된 자들인데, 이들은 여러 코뮌에서 보낸 사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민들은 추첨을 통해서 경찰 내지 군인의 역할을 한시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 16조는 학교 수업을 강제적 사항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코뮌은 선가를 통해서 교사를 선출하게 됩니다. 그밖에 지나간 모든 법적 규정들과 법 조항들은 인민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파기되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 데자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 푸리에: 상기한 조항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다음의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데자크가 1793년에 나타난 프랑스 혁명의 법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까닭은 오로지 구질서, 다시 말해 과거의 정부 기관, 인습적인 종교, 체제 사유재산제도 그리고 전통적인 가정제도 등이 지니고 있는 기존의 권한을 과감하게 파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에 비해 데자크는 과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해서 다만 부분적으로 흐릿하게 논평했을 뿐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우리는 데자크의 유토피아 사상에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푸리에와 프루동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푸리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폭리를 취하는 중간 상인계층을 거의 저주하다시피 했는데, 데자크 역시 이러한 성향을 근절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공공연한 물품 교환소로서의 바자회가 이윤만을 추구하는 상인 계급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데자크는 코뮌을 운영하면서, 노동이 권태로운 일감이 아니라, 즐거움과 유희를 전해줄 수 있도록 애를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데자크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에 노동의 경쟁을 부추길 게 아니라, 노동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는 일감일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견해 속에는 푸리에의 형향이 오롯이 배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데자크가 무조건 푸리에의 이론을 맹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푸리에가 생각해낸 “노동 군대”는 공동체 속에서 바람직한 그룹으로 형성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명령과 복종이라는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군대 체제는 자율적 삶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코뮌에서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데자크는 푸리에를 사회적 학문의 선구자로서 평가하였습니다.
9. 데자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 프루동: 그런데 데자크는 프루동의 이론에서 장점 대신에 단점을 더 많이 발견해냅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루동은 “소유는 절도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1848년의 부르주아 계급에 일침을 가했습니다. 데자크는 이 점을 좋게 평가했지만, 프루동을 중도파의 아나키스트라고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다시 말해 프루동은 자유로운 삶을 중시하지만, 아나키스트라면 당연히 모색해야 하는 극도의 자유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데자크가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셉 프루동을 비판한 것도 프루동이 오로지 경제적 현안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프루동은 리카르도 사회주의, 다시 말해 노동력과 관련되는 임금의 문제 그리고 교환가치와 관련되는 사안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 프루동은 초기의 이론을 수정하여 약간 변형시킨 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루동의 후기 이론에 의하면 사유재산을 철폐하는 일이 아니라, 재산이 서로 공평한 관계 속에서 존속될 뿐 아니라고 합니다. 문제는 자유와 평등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프루동은 자신의 추상적 논의를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Euchner: 45). 이를테면 데자크는 여성 문제에 관한 프루동의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여성은 결코 가정주부로 그리고 몸 파는 여자로 천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허영심으로 구성된 남정네들의 기고만장한 오성은 멋진 남성의 동상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려고 계획하는데, 늠름한 가부장의 모습 아래에는 시중들고 하녀로서 봉사하는 여성의 모습이 초라하게 서성거리고 있다고 데자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타하였습니다.
10. 계약을 중시한 아나키스트 프루동: 물론 데자크는 프루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사상적 조류 가운데 국가의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힘을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생시몽이라든가, 카베 그리고 루이 블랑 등의 사상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상호주의에 입각한 프루동의 사회 구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데자크의 아나키즘 유토피아와는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데자크가 사람들의 협동과 함께 일하는 작업을 중시한 반면에, 프루동은 인간의 이기주의의 의향 그리고 최대한의 유용성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프루동은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첫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토피아의 사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사람에 해당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프루동이 모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련성을 오로지 계약에 의존하여 고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프루동은 계약이야 말로 인간의 의지를 형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최고선, 자유를 보장해주고 낯선 여러 가지 특징들을 차단시키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프루동만큼 계약을 강조한 사상가도 없을 겻입니다. 계약은 개인과 개인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인위성을 전제로 합니다. 약속의 파기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성립될 뿐이며, 자연법의 차원에서의 개인의 권리와 관계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프루동의 사상은 시민적 자연법의 면모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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