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자크의 급진적 아나키즘 공동체 사상: 샤를 푸리에 이후로 가장 급진적 아나키즘 유토피아를 개진한 사람은 아무래도 프랑스의 조셉 데자크 Joseph Déjaque, 1821 – 1864)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는 19세기 후반부의 유토피아 설계자 가운데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헨리 맥케이 John Henry Macay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반니 로시 Giovanni Rossi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메케이는 사회주의와 개인주의를 서로 보완하는 코뮌의 가능성을 추적하여, 공유제에 근거한 공동체를 설계한 바 있습니다. 그는 생산력 강화를 위해 개인의 자유 경쟁을 용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의 정신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말았습니다.
개인주의는 인간 행동의 촉진제이며, 결국 사회의 풍요로움을 촉진시킨다고 하지만, 이는 협동과 상호부조의 사회주의의 근본적 자세와는 어긋나고 있습니다. (Mackay: 231). 이에 비하면 로시는 주어진 현실에서 실제로 공동체를 건설하여 활동하다가, 공동체의 어떤 바람직한 가능성과 한계 내지 위험 요소 등을 다루었습니다. 실현을 위한 로시의 현실 타협적인 특성에 비하면, 데자크의 코뮌 구상은 근본적으로 공유제에 근거한 아나키즘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의 측면에서 하자를 지닐 수 있지만,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 사회주의의 특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2. 함께 아우르며 살아가는 코뮌의 삶: 미리 말씀드리자면 데자크는 1848년에 자신의 논문에서 혁명 실패의 이유 내지 혁명의 한계를 구명하면서, 두 가지 사항을 주어진 사회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내세웠습니다. 그 하나는 탈-국가주의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아나키즘 공동체에서의 만인 평등의 삶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엘리트 계층과 무산계급 계층을 분리하는 블랑키즘에 처음부터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블랑키즘은 처음부터 “위대한 엘리트 그룹”과 “천박한 무산계급” 사이의 공생 내지 조화로운 공동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랑키즘의 한계는 아무래도 엘리트의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이들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관료주의 사회 체제의 운영에서 발견됩니다. 그렇기에 데자크는 일부의 계층, 다시 말해서 지배계층만의 사회 공산주의의 실험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산계급이 행할 수 있는 작은 기적 내지 요행 또한 처음부터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그것과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엘리트든 노동자든 간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함께 억압당하지 않고 함께 아우르며 살아가는 코뮌의 삶이었습니다.
3. 데자크의 급진적 아나키즘: 급진적 아나키스트인 데자크는 프루동과 마찬가지로 권력 기관인 국가를 누구보다도 저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미래 사회를 위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경제적 영역으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프루동은 사회적 근본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여성 해방의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고, 모든 유형의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를 경시한 바 있습니다. 프루동의 이러한 태도는 데자크에 의하면 커다란 실수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루동은 경제적 사안만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 밖의 다른 문제들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성을 해방시키고 아이들에게 그들의 고유한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코뮌의 관건이라고 여겼으며, 나아가 프랑스 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의 핵심사항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데자크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대상들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국가, 개개인의 고유한 자유를 간섭하는 종교적 계율, 결혼제도로써 사람들을 옥죄이는 가정 체제, 자식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는 부모의 권위, 사회 내의 가부장주의의 횡포, 부를 다음 세대로 이전시키게 만드는 유산 상속 제도, 좌지우지하게 만드는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군대 그리고 경찰 등 모든 권위주의의 이데올로기 기관들은 데자크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3. 4로계속 이어집니다.)
4. 데자크의 삶 (1): 조셉 데자크는 1821년 파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떻게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어떠한 학교를 다녔는지 등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데자크가 어른이 되어서 칠장이 그리고 도배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입니다. 데자크는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사고를 집요하게 추적할 정도로 강단을 지닌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국가 차원의 모든 개혁과 혁명을 거부하였으므로, 모렐리 Morelly의 『자연 법전』을 좋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서사시, 『바실리아데 Naufrage des Isles flottantes ou Basiliade』의 내용에 관해서는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1848년 파리의 6월 혁명 당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대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혁명 전선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때 약 40000명의 노동자들이 데모대에 결집하여, 국가 근위병, 경찰 그리고 군대에 대항하여 처절한 무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데자크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주동자로 몰려서 몇 차례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결국 2년의 구금 형과 2000 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데자크는 우여곡절 끝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영국의 런던으로 도주하였습니다. 1851년 12월 2일 다시 고향인 프랑스 파리로 밀입국했지만, 그는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정치범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어떠한 생업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그로 하여금 제 3의 나라를 선택하도록 강요합니다.
5. 데자크의 삶 (2):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의 노동자 연맹에 가담하게 됩니다. 1854년에 발표된 그의 글 「혁명적 질문 La question révolutinaire」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스케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어떠한 권력 정부, 어떠한 형태의 종교, 모든 사적 소유물 그리고 “결혼, 부권, 가부장주의 그리고 유산”에 의거한 가정의 권위와 가족체제 등이 깡그리 근절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의 자발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그대로의 절대적인 자유를 구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신, 사제 그리고 어떠한 제단도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함께 아우르면서 살아갸는 게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가족이 집단 소유제 내지 공유제를 표방하면서 하나의 코뮌에서 서로 협동하며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자크는 1856년에서 1858년 사이에 뉴올리언스에 체류하면서 소설한 편을 탈고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 영역, 아나키즘 유토피아 L’Humanisphère, Anarchique utopie』를 탈고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물을 간행해줄 출판사는 주위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프랑스 망명객이 발간하는 잡지 『자유, 사회 운동 저널』에 연재되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데자크는 프랑스와 미국의 제반 정치적 사건에 관해 논평하였으며, 특히 사형제도의 철폐를 강력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데자크의 말년은 잘 알려진 바 없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다시 영국 런던으로 혼자 돌아왔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사면되었을 때 데자크는 자신의 고향인 파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극심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다 타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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