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3) 데자크의 급진적 아나키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3. 5. 13. 11:39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프루동 사상에 대한 데자크의 입장: 상기한 데자크는 프루동의 사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만약 계약이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키지 못한다면, 어째서 그게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계약을 중시하는 사람은 주어진 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유를 압살할 수 있지 않는가?” (Déjaque 97).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데자크는 프루동의 입장이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과는 현격한 차이점을 드러낸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데자크가 플라톤 이래로 출현한 미래 사회에 관한 갈망의 상을 일원적 사상 내지 전체적 관점으로 파악하는 반면에 프루동은 주관적 자연법론자의 태도를 취하면서, 자유와 평등에 관한 논의가 오로지 개개인이 하나의 계약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프루동의 계약주의에 대해서 시대착오적인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17세기에 승리를 구가한 현대적 자연법사상이 과연 이것이 19세기의 변화된 현실에서 출현한 유토피아의 사고에 대해 얼마만큼 계속 자신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변화된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진부한 사고로 낙인찍히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12. 『인간 영역, 아나키즘 유토피아』: 이제 데자크의 소설 『인간 영역, 아나키즘 유토피아 L’Humanisphère, Anarchique utopie』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작품은 이미 언급했듯이 1858년 6월 9일에서 이듬해 8월 18일 사이에 잡지, 『자유, 사회 운동 저널』에 연재되었습니다. 여기서 데자크는 인류 역사를 여러 가지 유형의 착취 그리고 폭정의 연속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변화시키는 내적 동인은 착취 내지 폭정의 행위가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폭동이라고 합니다.

 

작품의 주인공 나는 이를테면 1848년 프랑스의 6월 혁명이 당국의 폭력에 의해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음을 거론합니다. 다시금 인민이 더 이상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그러한 시점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망의 상태에서 의식되는 것은 어떤 변증법적인 전복입니다. 주인공 “나”는 정신적 혼란 속에서 이성의 여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미는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처지를 언급하면서 주인공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동시에 혁명이 필연적으로 성공리에 끝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알려줍니다. 말하자면 이성의 여신은 100년이라는 세월의 장막을 열어젖히고, 주인공에게 서기 2858년이라는 미래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13. 정부 기관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데자크는 이전의 글 「혁명적 질문è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과도기에는 직접적으로 작동되는 인민의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역, 아나키즘 유토피아』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급진적 사고를 개진하였습니다. 저자는 그야말로 완성된 상태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미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왕이나 사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노예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주인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유 외에는 어떠한 무엇도 신봉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들은 타인의 지배를 받지도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형태의 기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푸리에가 생각해낸 공동체만이 자치적인 법질서를 실천할 뿐입니다. 자유로운 개개인은 각자 주권을 지니며, 공동체의 모든 결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일당 독재 체제가 없으니 아나키즘의 권위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과거에 왕들이 칼과 법령으로 개개인을 억압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코뮌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자유롭고 신성한 투표로 정해지는 공공연한 견해일 뿐입니다.

 

14. 종교적 계율, 가정 제도는 수정을 요한다: 과거의 모든 규칙이나 종교적 질서 역시 철폐되어 있습니다. 데자크는 “자유로운 인간은 결코 종교적인 사슬에 억매이지 않으며, 세속적인 질곡에 갇혀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Déjaque 125). 새로운 세상의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법에 의거한 가정이라든가 법에 의거한 사유재산 등의 질서를 극복해내었습니다. 동지애가 자리하는 공동체 내에서 노동은 강제적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으며,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제어 내지 구속받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머리로써 그리고 수작업으로써 물품을 생산해내는데, 이 모든 것은 공동의 자산이며, 만인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데자크는 푸리에에게서 많은 것을 빌려왔습니다. 가령 공동체 내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수직적 위계질서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15. 공동체의 공간 구도: 데자크는 자신의 코뮌의 공간적 구도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공동체는 하나의 별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면은 반드시 대칭의 구도로 이로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각 방향마다 고유한 특성이 드러나도록 축조하는 게 중요합니다. 건물의 내부는 매우 화려하고 우아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단아하고 소박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사치스러운 면도 드러납니다. 공동체의 인원은 약 오천 명에서 육천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남녀는 제각기 구분된 거주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주 공간은 두 개의 침실, 옷장이 붙어 있는 목욕실 하나, 서재로 활용되는 거실 하나 그리고 테라스 혹은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영역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집은 공기의 정화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벽난로의 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밖에 거주지에는 밝은 빛이 환하게 들어오며, 독자적인 수도 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구들은 오늘날의 가난한 상류층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정도의 예술적 화려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6. 남녀의 사랑의 삶: 데자크는 푸리에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공동체 내의 남녀의 사랑의 삶을 비교적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남자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의 애인을 거느릴 수 있다고 합니다. 데자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열정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를 지닌다. 그렇기에 애호의 감정 내지 사랑의 에너지는 우리의 욕구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Déjaque: 129). 따라서 어떠한 기관이나 상부 그룹도 개개인의 성과 젠더의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도덕적인 규제를 통해서 개개인의 사랑의 삶에 개입해서는 곤란하다고 합니다.

 

데자크는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주장합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스스로 원할 경우 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말고 자신의 사랑에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사랑을 나누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들 구분 없이 개별 인간에게 모든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습이라든가 법적 계약에 의해 구속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오로지 사랑의 파트너에 대한 이끌림만이 그들을 구속할 수 있으며, 인간적 향유만이 그들의 규칙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Déjaque: 128).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