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티엔 카베의 유토피아 상: 친애하는 C, 오늘은 생시몽과 함께 중앙집권적 유토피아의 상을 설계한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1788 - 1856)의 작품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카리스탈 경의 이카리 여행과 모험 Voyage et adventures en Icarie』이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1840년에 발표된 것입니다. 1788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에티엔 카베는 비상한 두뇌 그리고 열정적인 기질을 지닌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처음에 카베는 나폴레옹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했지만, 나폴레옹의 국가가 몰락한 뒤에 오히려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군주를 지향한 그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체된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카베는 1830년의 7월 혁명 당시에 샤를 10세를 무너뜨리고, 이른바 “시민의 황제”라고 일컫던 루이 필립을 옹립하는 정치적 과업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카베에게 중요한 것은 왕을 다른 왕으로 갈아치우는 일이 아니라, 어떤 사회주의의 이념에 따르며, 이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2. 저널리스트로서의 카베: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 - 이것은 18세기 초에는 거의 불가능한 과업으로 비쳤습니다. 그럼에도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카베는 이탈리아 비밀 결사단인 카르보나리 Carbonari의 당원이었습니다. 카르보나리 파는 –유럽의 건축물을 담당하던 석공 (石工)들이 만들어낸 초국가적 비밀 결사단체인 프리메이슨과 마찬가지로- 동지애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지향하는 비밀 결사조직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시기에 이탈리아가 네 개의 분단국가로 분할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적어도 카르보나리 파는 진보적 청년 운동임에 틀림없었습니다.
1830년 후에 카베는 “사람들 Le Populaire”이라는 신문을 간행하였습니다. 신문의 간행하는 일은 처음부터 아직 무지몽매한 인민을 계도하고, 자신의 뜻을 펴나갈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는 비근한 예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나중에 오산학교를 건립한 계기와도 비슷합니다. 안 선생은 미국 땅에서 상투를 쥐어뜯으며 싸우는 조선인들을 바라보고 개탄하다가, 독립운동보다도 시급한 일이 인민의 교육이라는 것을 깨달은 바 있었습니다.) 카베의 신문은 의외로 번창해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신문에 관해서 잘 몰랐지만, 진리를 접하려는 정보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게 결국 카베의 당시의 지론이었던 것입니다. 카베는 이와 병행하여 『1830년의 혁명의 역사 Histoire de la révolution de 1830』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3. 런던 망명의 삶 속에 집필한 문학 유토피아: 그러나 카베의 탄탄대로의 삶은 바로 1834년부터 급격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프랑스 정부는 1831년에 카베를 체포 구금하고, 그의 신문을 강제로 폐간 조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의 주필인 카베가 칼럼을 통하여 황제를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834년에 프랑스 황실 재판부는 황제 모독죄를 저지른 피고에게 5년의 감옥 혹은 5년의 해외망명이라는 조건부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부”란 피고가 두 가지 판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카베는 감옥에서 갇혀서 살아가는 것 대신에, 런던의 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영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던 카베로서는 오랜 망명 생활을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집필에 몰두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집필된 책이 바로 『이카리 여행』입니다. 카베는 어느 날 영국의 로버트 오언 Robert Owen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삶을 공동으로 영위하는 소규모 공동체에 관해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뒤이어 카베는 자신의 책을 집필하기 위하여 오언의 사상과 그의 문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오나로티 Buonarotti의 책 『바뵈프 그리고 평등을 위한 모반』이라든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의 문헌이 집필의 자료로 채택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인지 모릅니다.
4. 프랑스로 돌아온 카베: 1939년에 카베는 영국의 망명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옵니다. 당시 프랑스의 경제적 생산 양식은 영국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미 초기 자본주의의 단계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서서히 대도시가 발전되어 나가고, 매뉴팩처의 공업 기술이 도시에서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 왔습니다. 특히 영국의 산업 혁명의 여파로 사람들은 과학 기술에 대해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었습니다. 생시몽의 진단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을 카베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회적 진보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보수적 귀족을 중심으로 온존하고 있는 왕정 체제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사회주의에 관한 사상과 이를 위한 실천은 카베의 눈에는 처음에는 요원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카베의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입장은 그의 책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행여나 검열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하다가, “카리스탈 경의 이카리 여행과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카베의 책은 프랑스로 귀국한 이듬해인 1840년에 간행되었는데, 노동자 그리고 일반 독자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5. 소설의 화자, 이카리 여행: 친애하는 C, 이제 카베의 소설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국 출신의 귀족, 윌리엄은 1836년에 프랑스의 친구 유진과 함께 어느 날 “이카리”라는 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카리는 최근에 발견된 섬으로서,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카리”는 “이카리 해안”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추측컨대 카베는 신화적 인물, 이카로스가 빠져 죽은 바로 그 바다에서 어떤 가상적인 장소를 도출해낸 것 같습니다.
윌리엄의 친구, 유진은 프랑스인으로서 7월 혁명의 여파로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 사람으로서 카베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이카리의 찬란한 국가를 살펴보고, 그들이 처하고 있는 유럽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두 사람 사이의 열정적인 토론은 간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카리에서의 찬란하고 풍요로운 삶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토론에서 독자는 다음의 사항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인들 사이의 적대감 내지 민족 사이의 암투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시각 차이에서 유래하는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사항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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