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과학 기술을 중시하는 공동체: 팔랑스테르 공동체는 과학 기술과 학문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 질서는 학문과 기술에 의해서 추진되는 생산력의 신장을 요구합니다. 과거의 학문이 실제 현실의 경제적 생산 구도를 은폐하거나 무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삶과 직결되는 학문과 과학 기술은 공동체에게 전체적으로 공동선과 부를 마련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19. 일부일처제를 폐지한 자유로운 삶: 푸리에는 인간 삶의 황폐화의 원인을 산업 외에도 일부일처제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부부 간에 영속적인 정조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부일처제는 상대방을 속이고, 은밀하게 행해지는 성적 관행을 은폐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적 욕망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종족 보존을 결혼의 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형을 양산시키게 합니다.
남자들은 아내를 속이고 술집이나 홍등가에서 성적 욕망을 충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시민사회의 여성들입니다. 가부장적 시민사회에서 여성들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경우 노예처럼 살아간다고 푸리에는 말합니다. 실제로 19세기에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을 경우 남자와 달리 홍등가를 찾거나, 다른 남자를 사귈 가능성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남창은 20세기 후반부에 생겨난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20. 남녀평등: 그렇기에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여성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버틀란트 럿셀 Bertrand Russell이 “결혼한 여성은 가축 같은 존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시민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의 강력한 영향 때문입니다. (럿셀: 65쪽 이하).
팔랑스테르 공동체는 시민 사회와는 달리 여성에게도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평등에 관한 푸리에의 진보적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제외한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남녀평등을 강조한 사람은 오로지 오언, 푸아니, 푸리에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실은 지나간 서양의 역사가 얼마나 가부장주의의 구도로 이어져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1. 두세 달을 주기로 이루어지는 파트너의 교체: 팔랑스테르의 사람들은 규정상 2개월 내지 3개월마다 한 번씩 파트너를 교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당사자가 원할 경우에 한해서 행해질 뿐, 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고 합니다. 이는 남녀 당사자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경우에 가능하며, 짝사랑의 경우 파트너의 교체는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하여 팔랑스테르의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팔랑스테르에 부부가 존재하고, 자식을 둔 가정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 사람들은 대체로 일부일처제를 무조건적인 절대적 진리로서 신봉하지는 않습니다. 자고로 자유로운 인간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으니, 실질적으로 혼인, 가족의 의미는 푸리에의 공동체에서는 시민사회의 그것처럼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 사람과 오랫동안 부부처럼 살아가려는 공동체 회원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예외가 인정됩니다.
22. 실험으로서의 사랑의 삶: 이를테면 18세 이상의 성인들은 푸리에에 의하면 세 명의 이성과 만나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예컨대 성년의 처녀 (혹은 사내)가 조우하는 세 사람의 파트너는 (1) 장차 결혼할 파트너, (2) 출산 후보자, (3) 애인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결혼할 파트너”는 차제에 남편 혹은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둘째로 출산 후보자는 자식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될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랍게도 부부관계가 자식 출산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애인”은 심리적 위안을 얻는 당사자를 가리킵니다. 장차 “결혼할 파트너”는 삼각관계의 갈등과 질투의 고통을 견뎌내는 여러 번의 검증 과정을 통해서 남편으로, 아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3. 일부다처제 내지 다부일처제는 부도덕한가?: 공동체에서 임에 대한 사랑과 질투가 어떻게 조절되는가? 자식을 어떻게 책임지고 교육시킬까?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당시 학자들 가운데에는 팔랑스테르의 삶이 도덕적으로 불결하고 문란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혹자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일부다처제 내제 다부일처제가 더럽고 추악한 관계를 맺게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팔랑스테르 공동체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를 아무런 금기 없이 선택할 수 있고, 성적으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민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의 이러한 견해는 무작정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혼 제도와 일부일처제가 파기되면, 사람들의 관계는 문란해지고, 불결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적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 Sex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입 속에 고인 침과 같습니다. 나의 입 속에 고여 있는 침은 깨끗하지만, 길거리에 남이 뱉은 침은 더럽고 추악하게 보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성에 대한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푸리에는 팔랑스테르 공동체가 방종하고 저열한 단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평형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하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 자행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파트너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생활관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공동체의 갈등은 자발적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 프시케의 나비로 거듭나는 삶: 문제는 성에 있어서 소유와 질투의 감정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물음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임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긴 경우, 사랑하는 임을 빼앗긴 당사자는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푸리에는 이 역시 더 나은 삶을 실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르키소스와 프시케의 가상적 결합을 예로 듭니다.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나비를 뜻하는데, 영혼의 불멸성을 설명하는 데 나비만큼 훌륭한 비유는 없습니다. 인간 영혼인 프시케는 나르키소스로 인해 나타나는 괴로움과 불행을 스스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나르키소스는 다른 이성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 프시케를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괴로움과 고통을 정화시킨 다음에 프시케는 참으로 순수한 행복의 기쁨을 만끽하게 됩니다.
마치 보기 흉한 애벌레가 나중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로 거듭나서 찬란하게 비행하는 것처럼, 푸리에는 가장 보기 흉한 일부다처 내지 다부일처의 생활 방식을 통해서 인간은 의외로 가장 숭고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Fourier 259). 사랑하는 남녀는 더럽고 불결하게 보이는 성적 욕구를 부자유스러운 일부일처제에 묶어둘 게 아니라, 그것을 해방시킴으로써 나와 타인에게 거룩하고 고결한 성적 파트너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25. 현대적 의미의 향락의 사회: 인간이 갈구하는 유토피아 - 그곳은 푸리에에게는 바로 팔랑스테르로 투영되었습니다. 팔랑스테르는 오래 전에 인간이 갈구한 “놀고먹는 사회 Schlaraffenland”의 현대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의 시스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평균 144살까지 살 수 있다고 푸리에는 억지 주장을 펼칩니다. 게다가 행복의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정착되면,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이 3700만명, 뉴턴과 같은 수학자가 3700만명 그리고 몰리에르와 같은 극작가가 3700만명이 출현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푸리에는 기발할 정도로 행복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행복의 오로라는 푸리에에 의하면 여덟 가지 조화의 단계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빛과 열을 비치는 북극의 왕관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나 봄이 지속되고, 바닷물은 그 자체 달콤한 음료수로 활용됩니다. 맹수는 사라지고, 반 상어, 반고래, 반 사자가 태어납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운송 수단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 전체는 서서히 팔랑스테르로 뒤덮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세상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로 규정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무조건 엉터리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푸리에가 상상한 반 상어, 반-고래, 반-상어에 관한 상은 오늘날 현실로 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호화 유람선, 자동차 그리고 고속 기차 등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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