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 9

서로박: 카프카의 '학술원을 위한 보고' (2)

(9) 충동과 무의식을 택할 것인가? 문명, 초자아를 택할 것인가? 친애하는 B, 카프카의 매력은 작품의 다양한 해석에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카프카의 단편을 어떤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빨간 피터가 유인원으로서의 본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문화를 습득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 문명이 충동의 억압으로 인하여 발전되어나간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의 문화 이론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를테면 빨간 피터는 자신의 여자 친구인 침팬지와 함께 있으면, 심리적 편안함을 유지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뭍 인간들을 대할 때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빨간 피터는 맨 처음 아프리카에서 총을 맞았는데, 이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거세 행위와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43 20전독문헌 2022.03.15

귄터 아이히: 꿈 IV

거리에는 이정표들이 있다,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여러 강줄기 높은 점 가장자리에는 전망 기구들 호수들을 푸르게 그려놓은 여러 지도 숲들은 초록으로. - 세상에서 길 찾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나 내 곁을 지나가는 그대여, 그대의 마음속 풍경은 어찌 그리 감추어져 있는가! 빽빽한 숲, 감추어진 심연에 대한 두려움이 이따금 엄습한다, 안개 속에서 더듬거리며. 난 알아, 누가 네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그대 말은 메아리 쳐서 우릴 혼란스럽게 한다는 걸. - 목표를 지니지 않은 도로, 출구 없는 어느 영역, 몰락한 이정표. 해마다 새로운 사실들이 무언가를 감추고, 어느 공터는, 사랑의 흥미로운 눈에는 너무 많이 자라나, 점점 빽빽해지는 잎에 의해 고독으로 덮여 있다. Träume (IV) Es..

21 독일시 2021.11.21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3)

7.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첼란은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가령 이반 골 (Ivan Goll, 1891 - 1950)의 아내, 클레어 골은 첼란이 1953년에 간행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서 죽은 남편의 시구를 마구 베꼈다고 주장하였다. 시적 표현들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다른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굳이 잘못 아닌 잘못을 찾는다면 그것은 체험현실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발견되는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전후 독일 문학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시,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소지품 목록」이 체코의 시인 리하르트 바이너 (R. Weiner, 1884 - 1937)의..

22 외국시 2021.10.21

(명시 소개)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공간. 김광규의 시「물오리」 (3)

날다가 죽어 털썩 떨어지는 오리는 얼마나 부러운 삶이랴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 그 먼 곳을 유유히 넘나드는 축복받은 새 나는 때때로 오리가 되고 싶다. 너: 앞에서 시적 자아는 “일어서도 또 일어서고 싶고/ 누워도 또 눕고 싶은” 욕구를 안타까운 몸부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지만, 언제 죽는지 스스로 모릅니다. 이에 비하면 물오리는 삶과 죽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날다가 죽어 털썩” 공중에서 떨어질 뿐입니다. 너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 그 먼 곳”이 이 시의 아포리아이자 핵심적 의미를 담은 장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요약될 수 있을까요? 나: 첫 번째는 전기적 해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 장소는 단순히 시인의 고향일 수 있어요. 외국 문학..

19 한국 문학 2021.06.22

서로박: 아이히의 '비테르보의 소녀들'

귄터 아이히 (1907 - 1972)의 방송극, 「비테르보의 소녀들 (Die Mädchen aus Viterbo)」는 1953년 3월 10일 남서방송극 바덴바덴, 브레멘 방송국 그리고 남독 방송국에서 차례로 발표되었다. 아이히는 50년대 초반에 가장 활발하게 방송극을 집필하였는데, 이 작품은 아이히의 문학 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70세 노인 골트슈미트 그리고 그의 손녀, 17세의 가브리엘레는 유태인 피난민이다. 그들은 히틀러 정부에 의해 체포되지 않으려고, 베를린의 어느 주거지에 숨어서 살고 있다. 특히 골트슈미트는 지하실 아래에 있는 밀실을 발견하여, 손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목숨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일말의 희망 등이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그들을 내리 짓누른다. 너무..

44 20후독문헌 2021.03.31

아이히 그리고 아이힝거

귄터 아이히는 자신의 방송극 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 잠들지 말라,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너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들의 권력을 믿지 말라! 만약 누군가 너희 심장의 공허함을 고려할 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라! 유익하지 않은 일을 행하라, 사람들이 너희의 입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를 불러라! 불편한 자가 되라, 세계라는 기계 속의 기름이 되지 말고 모래가 되라!"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는 1907년 레부스에서 태어나서 1972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를 써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929년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아이히의 시는 대부분 자연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어가 정갈하..

9 문학 이야기 2019.04.04

서로박: 아이히의 두더지들

귄터 아이히의 텍스트, "두더지들 (Maulwürfe)"은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씌어졌다. 그것은 총 140개의 짧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문시도 아니고, 꽁트도 아니다. 어쩌면 ?두더지들?은 종래의 문학적 장르로 규정될 수 없는 실험적 텍스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짤막하고, 여러 가지 내용을 유추하게 해주는 언어 스케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텍스트들은 통상적인 의미 구조를 벗어나고, 서로 다른 의미 내용을 서로 어색하게 접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아이히의 텍스트를 “시적 무정부주의”라고 명명한 바 있다. 아이히의 텍스트들은 여러 곳에서 개별적으로 발표되었다. 1972년 ?두더지 모음집?으로 간행되었다. 두더지는 땅 속으로 굴을 파는 포유동물이다. 대부분 작음 ..

44 20후독문헌 2018.07.08

서로박: 아이히의 꿈들 (2)

다섯 번째 꿈: 뉴욕에 사는 가정주부, 루시는 어머니를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어머니가 매우 반갑게 여겨집니다. 대화 도중에 그들은 어떤 기이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어떤 곤충들이 무언가를 갉아먹는 소리였습니다. 곤충은 다름 아니라 흰개미들이었습니다. 흰개미들은 사람이든 집이든 닥치지 않고 갉아먹습니다. 뉴욕의 대부분 건물은 흰개미의 공격으로 인하여 서서히 내려 앉게 된 것입니다. 흰개미는 건물만 갉아먹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파먹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입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루시뿐 아니라, 루시의 어머니 그리고 그미의 남편 역시 흰개미의 희생물이 됩니다. 뇌우가 울려 퍼질 때 집, 도시 그리고 전 지상이 폭삭 내려앉게 됩니다. 그렇다면 흰개미가 상징하..

44 20후독문헌 2018.04.06

서로박: 아이히의 꿈들 (1)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방송극 「꿈들」은 1951년에 씌어져서 함부르크 북서 방송국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신문과 TV를 통해서 한국동란 그리고 비키니 섬의 원폭 투하의 소식을 접한 것 같습니다. 아이히는 방송극 장르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그의 방송극 가운데에서 이 작품은 아이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G. 프라거 (G. Prager)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의 방송은 방송극의 “출생 시간”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아이히의 이 방송극은 가장 실험적인 방송 문학에 해당합니다. 작가들은 청각적 그리고 언어적 전위주의를 포기하지만, 전통적인 극적 구성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합니다. 다섯 개의 꿈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

44 20후독문헌 201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