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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아이히의 꿈들 (1)

필자 (匹子) 2018. 4. 6. 12:12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방송극 「꿈들」은 1951년에 씌어져서 함부르크 북서 방송국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신문과 TV를 통해서 한국동란 그리고 비키니 섬의 원폭 투하의 소식을 접한 것 같습니다. 아이히는 방송극 장르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그의 방송극 가운데에서 이 작품은 아이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G. 프라거 (G. Prager)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의 방송은 방송극의 “출생 시간”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아이히의 이 방송극은 가장 실험적인 방송 문학에 해당합니다. 작가들은 청각적 그리고 언어적 전위주의를 포기하지만, 전통적인 극적 구성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합니다. 다섯 개의 꿈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과 끝에 작가적 발언으로써 연결되어 있고, 시작품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가령 첫 번째 꿈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너와 관계된다.”

 

첫 번째 꿈: 컴컴한 열차 칸 속에서 어느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약 40년 전에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는 침대에서 끌려나와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들은 꽃, 산, 일요일의 양복 등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이후의 세대는 이를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다른 바깥의 외부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천적 맹인이 무지개의 색을 감지하지 못하듯이, 아이는 빛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누군가 그들에게 넣어주는) 빵이 원래 부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한 번도 부패하지 않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지는 편견에서 비롯하며, 편견은 차단된 현실적 조건에서 파생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기차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이 기차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 탈것인 셈입니다.

 

첫 번째 꿈이 상징하는 현실적 상황은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어쩌면 부자유의 질곡에 차단되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파시즘의 폭력 하에서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갇힌채 살아가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어느 기차 속에 갇혀서 수십 년 동안 생활했다는 사실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과거 자유로웠던 삶을 기억해내지만,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를 꾸며낸 이야기로 단정 짓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자유로운 바깥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건대 첫 번째 꿈의 형실은 억압과 부자유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본보기와 같습니다.

 

두 번째 꿈: 중국의 쌀장수의 딸의 이야기입니다. 그미는 어느 중국 부부에 관한 끔찍한 꿈을 꿉니다. 그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병든 부유한 중국인에게 팔아넘깁니다. 이 중국인은 6세 아이를 구매하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내었던 터였습니다. 6세의 아이를 찾는 것은 마치 인삼의 육년 근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국 아이를 구매한 중국인은 자신의 건강을 되찾으려고 아이를 살해하여 장기 (臟器) 등을 삶아 먹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인육을 먹어치운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살인을 암시합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원자 폭탄 실험하던 장소 비키니 섬 그리고 한국 전쟁 등을 직접 거론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매하여 먹는 일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살해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어린이를 마치 고깃덩이처럼 잡아먹는 이야기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식인종의 이야기는 일견 아프리카 혹은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일회적인 에피소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삶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정책, 여자들을 정신대에 끌려가는 정책 등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살육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을 정확한 날짜에 갚지 않을 경우 장기를 팔게 하는 패륜의 행위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히는 두 번째 꿈에 이어지는 막간 시에서 1950년 한국 동란 그리고 비키니 섬에서의 원자폭탄 실험에 관한 사항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꿈: 어느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술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이 꿈은 추방당하는 가족을 생생하고도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적”이 다가오게 되자 그의 가족은 집밖으로 추방당합니다. 다만 가장 나이 어린 딸이 인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적”은 그의 가족만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형은 애호하는 물품으로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객체일 수 있습니다. 적은 인형을 가진 사람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박해합니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가족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나 거절당합니다. 그들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꿈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인형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인형은 어쩌면 유대인들이 모시는 야훼 신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술자의 꿈은 누군가에게 쫓겨 정처 없이 방랑한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숙명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고향도 터전도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민족이 겪어야 했던 대학살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 번째 꿈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남아메리카에서 살고 있는 인디언부족을 생각해 보세요. 거대한 자본가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땅을 잃고, 그곳을 쫓겨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인디언부족에게 땅이란 자신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독일 출신의 미국작가 B. 트라벤 B. Traven이 『백장미』라는 소설에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꿈: 어느 모스크바 출신의 지도 측량사는 어느 아프리카 원시림 속에서 기이한 꿈을 꿉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북소리는 몰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산의 “파”로 조리된 이상한 음식을 먹은 다음에 두 백인 남자는 자신의 혀가 마비되는 것과 같은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이 미국 출신인지, 아니면 소련 출신인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떤 독초를 잘못 먹어서, 서서히 언어의 능력 및 기억력이 상실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언어의 능력과 기억력을 잃게 됩니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자신이 열도의 정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망각의 늪 속에 서서히 빠져듭니다.

 

네 번째 꿈에서 시인은 네 번째 꿈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두 백인 남자가 어떠한 직업을 지닌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과학자인가, 아니면 상인인가? 하는 물음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검은 아프리카 대륙이 백인들에게는 거대한 먹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의 개발에 나섰습니다. 금, 은 그리고 보석 그리고 아프리카의 동식물은 그들의 재화를 보장받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흑인아이들이 어떻게 굶주림에 시달리며, 이들의 생활과 문화가 어떠한지에 관해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귄터 아이히는 제 1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자연을 무작정 이용하려는 서구인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해 경고를 보내려 했을까요? 어쩌면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