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아이히 그리고 아이힝거

필자 (匹子) 2019. 4. 4. 06:28

귄터 아이히는 자신의 방송극 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 잠들지 말라,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너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들의 권력을 믿지 말라!

만약 누군가 너희 심장의 공허함을 고려할 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라!

유익하지 않은 일을 행하라, 사람들이 너희의 입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를 불러라!

불편한 자가 되라, 세계라는 기계 속의 기름이 되지 말고 모래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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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는 1907년 레부스에서 태어나서 1972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를 써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929년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아이히의 시는 대부분 자연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어가 정갈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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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아이히가 태어난 도시 레부스를 가리킵니다. 레부스는 오더 강가의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위치한 소도시입니다. 그의 부모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1930년부터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아이히는 중국문학Sinologie을 전공하여, 그의 사고 그리고 예술적 촉수 속에는 중국 등의 동양 문화가 은밀히 용해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그가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내적인 제국이라는 잡지입니다. 1930년에 아이히는 카바레티스인 여인 엘제 부르크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은 195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1939년 이후에 아이히는 하사관으로 징집되어 군복무하였습니다. 군복무 중에 그는 150편의 원고를 집필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원고는 독일 군인을 위한 단순한 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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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독일 남부에 있는 란츠후트 근처의 가이젠하우젠이라는 지역의 모습입니다. 전쟁 직후에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에 아이히는 이곳에 있는 미군의 전쟁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전쟁 포로가 된 그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완성된 것은 그의 명작, "간이 변소" 그리고 "소지품 목록  Inventu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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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귄터 아이히의 소지품 목록이라는 시입니다. 어느 장소를 떠올리는가요?

"이건 나의 모자/ 이건 나의 외투,/ 아마 포대 속에는/ 여기 내 면도기. Dies ist meine Mütze,/

dies ist mein Mantel,/ hier mein Rasierzeug/ im Beutel aus Leinen.

두 개의 깡통들은/ 나의 접시, 나의 잔,/ 하얀 양철에다/ 내 이름 새겼다. Konservenbüchse:/

Mein Teller, mein Becher,/ ich hab in das Weißblech/ den Namen geritzt.

여기 새겨 넣었다,/ 열망하는 눈을 피해/ 내 몰래 숨겨둔/ 이 귀중한 못으로. Geritzt hier mit/

diesem kostbaren Nagel,/ den vor begehrlichen/ Augen ich berge.

빵 주머니 속엔/ 한 켤레 털양말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물건들이 있다. Im Brotbeutel

sind ein Paar wollene Socken/ und einiges, was/ ich niemand verrate,

그건 밤에는 나의/ 베개로 쓰인다./ 나와 땅 사이에/ 놓인 여기 마분지.so dient es als Kissen/

nachts meinem Kopf./ Die Pappe hier liegt/ zwischen mir und der Erde.

가장 아끼는 것은/ 무엇보다 연필심,/ 밤에 생각한 것을/ 낮에 시로 쓰니까. Die Bleistiftmine/

lieb ich am meisten:/ Tags schreibt sie mir Verse,/ die nachts ich erdacht.

이건 나의 노트,/ 이건 나의 천막,/ 이건 나의 수건,/ 이건 나의 실타래.Dies ist mein Notizbuch,/

dies ist meine Zeltbahn,/ dies ist mein Handtuch,/ dies ist mein Zwi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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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인용한 시를 읽으면 어느 곳이 떠오르는가요? 귄터 아이히는 미군 포로 수용소에 갇힌 채 위의 시를 썼습니다. 노숙자가 되면, 수인이 되면, 우리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위의 하찮은 사물 하나하나가 귀중한 것으로 사용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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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독일 남부 퓌센 근처의 반발트 호숫가의 집을 가리킵니다. 이곳의 주인은 사진작가 일제 슈나이더-렝엘이었는데, 젊은 작가들에게 집을 제공하였습니다. 한스 베르너 리히터Hans Werner Richter는 독일 전역의 작가들에게 연락하여 모임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로써 전후 독일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47 그룹이 탄생하게 됩니다. 1947년에 결성되었다고 해서 47 그룹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아이히는 47 그룹의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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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그룹은 많은 탁월한 작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아이히,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 지크르리트 렌츠,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 등이 47 그룹에 속합니다. 47 그룹은 서족의 문단을 주름잡았고, 1960년대 후반까지 서독의 문학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왼쪽부터 하인리히 뵐, 일제 아이힝거, 귄터 아이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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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는 자연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바이에른이 고향은 아니었지만, 제 2의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사진은 바이에른의 프린Prien이라는 소도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멀리 웅장한 알프스 산맥이 보입니다. 앞에 보이는 것은 킴제 호수 속에 있는 호수 속의 섬, 즉 호도 (湖島), 프라우엔 섬 Fraueninsel 입니다. 킴제에 가면 호도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프라우엔 섬이고, 다른 하나는 헤렌 섬입니다. 귄터 아이히는 이곳에 들러서 자주 휴가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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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귄터 아이히의 방송극 "꿈들"이 처음으로 발표되었습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실명한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매체는 라디오 방송이었는데, 아이히는 이들을 위해서 방송극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꿈들"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령 두 번째 꿈은 중국에서 6세 아이를 가마에 넣어서 삶아먹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청취자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히는 이로써 인간은 그 속성상 식인종처럼 타인을 잡아 먹는다라는 사실을 부각시켰습니다. 놀라운 것은 작품 속에 한국동란 그리고 비키니 섬의 핵실험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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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쩌면 불충족한 오관을 지닌 채 살아가는 두더지인지 모릅니다. 스스로는 영리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저세상을 모르며, 일곱 색 바깥에 있는 색깔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 우리는 고래가 듣는 저주파 음을 식별할 줄 모르며, 주어진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끼지는 못하지요. 하늘 위의 혹성들은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태양 주위를 돌지만, 인간은 이에 주눅이 들어서 굉음을 듣지 못합니다. 아이히는  두더지들이라는 연작 산문을 통해서 인간의 이러한 불충족한 삶의 측면을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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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독일어 어학을 전공하는 분은 아이히의 방송극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작품은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기 참으로 수월합니다.

 

 

 

아이히는 1953년 오스트리아의 작가 일제 아이힝거와 결혼하였습니다. 일제 아이힝거 (1921 - 2016)의 어머니는 유대인으로서 쌍동이 딸을 낳았습니다. 일제와 헬가 미치가 바로 그 쌍동이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혼한 다음에 두 딸을 데리고 린츠에서 살았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 헬가 미치는 체육 장학생으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여 어머니와 일제는 출국할 수 없었습니다. 행여나 나치 군인들에게 잡혀갈까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미는 마치 안네 프랑크처럼 린츠의 고도시에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사진은 오스트리아의 중북부에 위치한 도시 린츠의 고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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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은 일제 아이힝거이며, 오른쪽은 헬가 미치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아이히는 짤막한 산문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장편소설 (掌篇小說, Kurzgeschichte)입니다. 여기서 아이히는 68 학생 운동 이후의 독일 사회를 냉정하게 고찰하면서 자신의 무정부주의의 관점을 기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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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편물이 밤에 와서

달이 여러 가지의

아픈 마음을 문 아래로

살며시 밀어넣으면

그것은 하얀 가운 걸친

천사들처럼 나타나

조용히 복도에 서 있겠지. (일제 아이힝거의 편지 교환)

 

1. 시적 음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 창작 기법은 무엇일까요?

2. 시인은 어떠한 이유에서 편지를 "여러 아픈 마음"이라고 표현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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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귄터 아이히와 일제 아이힝거 사이에서 태어난 클레멘스 아이히 (1958 - 1998)를 가리킵니다. 클레멘스 역시 시인으로 등장했으나, 그는 처음에는 배우로 일했으나, 작가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클레멘스 아이히는 1998년 2월 22일 일요일, 며칠 동안 섬망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빈의 지하철에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즉사하였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모가 죽으면, 땅 속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모든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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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의 카페. 언덕 길에 이러한 카페가 많이 있습니다. 시인은 대화를 통해서 문학적 자양을 공급 받습니다. 5G 통신이 통용되는 첨단 과학 기술이 사용되는 오늘날 시인은 더 이상 카페를 찾지 않고, 이 메일을 통해서 그리고 동영상을 통해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혼자 컴퓨터 자판 앞에서 시인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동영상을 감상합니다. 오늘날 시인은 무엇으로 시적 착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귄터 아이히는 말년에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살다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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